본문: 요한복음 10장 1~21절
1.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의 이미자를 통해 말씀하신 기록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인 예수님을 ‘양’인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22~39절).
그것도 이방인(BC167년, 안티오커스 에피카네스)이 더럽힌 성전을 수리하고, 깨끗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수전절(修殿節, Hanukkah, 22절)’에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친히 성전(聖殿) 되심을 선포하신 예수님(요2:19), 친히 성막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려는 예수님(요1:14)을 말입니다.
‘사도 요한’의 마음, 그를 통한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해보십시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는커녕 그 분을 돌로 쳐죽이려는 ‘양(유대인들)’의 태도와 마음 상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2.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 나에게 부담스럽고, 아프고, 찔리는 말씀이 들릴 때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분노가 에너지가 되어 마음의 돌을 움켜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여전히 ‘영적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영적 맹인’을 벗어났으면서 여전히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함으로 경험한 어둠이 너무 너무 두렵습니다. 빛이 무엇인지 조차 경험하지 못했던 맹인의 삶이 섬뜩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눈을 떴다는 단순한 기쁨에 머물지 않습니다. 빛을 더 갈망합니다. 다시 어둠에 처할까 참 빛이신 예수님! 성령의 비춰 주심을 갈망하게 됩니다.
3. 오늘 본문 설명보다 이런 것을 더 강조하여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9장’은 하나로 연결된 내용입니다. (장과 절로 구분된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맹인’에서 ‘양의 문’, ‘선한 목자’ 그리고 ‘목자의 음성’으로 계속 연결됩니다. 영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인간!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유리 방황하는 인간! ‘선한 목자’의 음성이 아닌, 사탄 마귀의 유혹에 이끌려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외침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1~2절의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주신 ‘대속의 은혜를 통한 죄용서와 구원의 방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1절) 너희가 생명을 다시 얻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17~1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16절).
4.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괜한 부러움(?)이 들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살짝 질투(?)가 났습니다.
이유는 “문을 통하여” 때문입니다. “문을 통하여”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입니다. 9절에 분명히 “내가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다른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다른 구원의 방법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온전히 이루심’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 강도, 도둑”은 이전에 행했던 ‘대속의 제사(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가 완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말하는 종교 제사를 행하는 것을 통해 구원받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갖은 종교행위와 자기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것을 말합니다.
5.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더 이상 인간의 의로움 따위는 드러나면 안 됩니다. 그 어떤 포장지, 껍데기도 뒤집어 씌우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예수님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영혼의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고백이 진실이라면,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또 깨닫습니다. 이 본문에 묻어서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려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선한 목자’는 좋은 목회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양’은 목회자에게 맡겨진 교인이 아닙니다. 죄인인 저도 그저 ‘선한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양’일 뿐입니다.
저의 눈 먼 것이 사실이기에, 저의 듣지 못함이 진실이기에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과 들려주심을 간구합니다.
오늘, 지금 나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절박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붙들게 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참 승리와 평안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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