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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2022년 수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3년 7월 31일

본문: 사무엘하 6장 12~23절



1.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려는 다윗의 두번째 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주어가 다윗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으로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 둔 사람은 다윗입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일어난 ‘웃사의 죽음’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급한대로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의 궤’를 옮겨 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궤를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등”을 말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다윗에게 12절의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한 12절의 소식은 ‘웃사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고민에 빠져 있는 다윗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2. 다윗이 듣게 된 소식, 그 소식은 ‘복’입니다! 복! 모두가 좋아하는 그것, 복입니다. 복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을 거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복의 본질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복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름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복에 대한 이해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복 받았다. 복 받으세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과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이것 한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원한 동행(동거)’입니다.

진정한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동행입니다. 영원! 시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 속에서 단 한 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걸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과 동거를 거절했습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함을 싫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사탄의 속임수와 꾀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택한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대신 죽는 존재! 하나님을 싫어 버린 죄인을 떠난 범죄한 인간을 대신 해서 죽어야 할 제물에 모든 죄를 전가 시키시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3.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웃사의 죽음’을 ‘종교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라는 단순한 해석으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웃사의 죽음’을 내 심령에 비춰야 합니다. 가만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렇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게 하시고, 다시 영원히 나와 동행(동거)하시려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려는 진정한 복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복이 내게 임한 것이 기쁨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다윗 성(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섯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를 대속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 그 분이 나와 온 이스라엘에 다시 임재하신 것이 너무 기뻐 춤을 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여섯 걸음마다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린 것은 너무 한 것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18~19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떡과 고기를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화목제’는 드린 제물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임재하시는 것은 속죄라는 아프고, 괴로운(?) 과정에 머무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진정한 풍성함과 배부름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배부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새겨봅시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되어야 만 진정한 만족과 감사가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허망한 것이 덜 채워지고, 더 채워지는 것으로 들뜨지 않습니다.

‘오벳에돔의 집’에 임재하신 하나님, ‘오벳에돔’의 특별한 행동 때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저의 묵상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오벳에돔(다윗과 온 이스라엘 포함)’ 그냥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아무 공로 없이 누렸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네, 대신 죽은 ‘웃사’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알레고리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웃사=예수 그리스도’라는 도식화된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웃사, 오벳에돔,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그 진정한 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속에 영혼이 헤엄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육체가 먼저 반응하지 않습니다.

내가 맞이한 그 일 앞에서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며,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진정한 복을 마음껏 누리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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