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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하 6장 1~11절



1. ‘사무엘하 6장’내용은 ‘하나님의 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서 살펴보신 것처럼 ‘이스보셋’이 암살 당한 뒤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그렇게 다윗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바알레유다’에 있는 ‘아바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진정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4~7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사건과 ‘벳세메스’를 거쳐 ‘기럇 여아림(바알레유다)’로 돌아오게 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사울 왕이 통치하던 기간(40년 및 그 외 사무엘 시대 약 20년 포함)와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기간(7년 6개월) 및 예루살렘 탈환까지의 기간를 합쳐 적어도 70여년 이상을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참고로 ‘아비나답’과 ‘오벧에돔’은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2. 다윗은 나름 매우 신중하게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절에 “뽑은 무리 삼만 명”은 군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일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궤’를 보호할 호위병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은 블레셋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블레셋을 쳐서 이겼습니다. (5장 17~25절)그러나, 블레셋을 완전히 궤멸시킨 것은 아닙니다. 위협의 세력은 남아 있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함께 기뻐할 사람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서 대표들을 뽑아서 그 자리에 함께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뻐하고 싶은 다윗의 마음입니다. 당연히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자발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웃사’가 죽었습니다. 6~7절의 기록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3. 이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요? 첫째, 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궤’는 반드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한다는 사실(민수기 4장 15절)을 모르는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대한 성경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종교 절차 무시’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혹은 징계로 여기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우리 성도님들은 두번째 이유를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규례를 어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예수님이 다 용서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셨다’라는 이유만 댈 수도 없습니다. ‘웃사의 사건’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셔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읽도록 하신 하나님의 진심이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4. ‘웃사’의 죽음으로 가장 많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네, ‘다윗’입니다. 8절 “다윗이 분하여”에서 “분하여”라고 번역한 ‘charah’는 단순히 ‘화난, 분노한(angry, furious)’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으로)괴로워하는, 아파하는’의 의미입니다.

‘웃사’의 죽음 때문에 다윗은 아파했습니다. 9절의 기록은 ‘웃사’의 죽음으로 괴롭고, 아프고, 심지어 두렵지만,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간절한 마음의 기록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가까이할 수 있을까?”라는 다윗의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베레스웃사’의 뜻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웃사를 쳤다’는 뜻의 ‘베레스웃사’도 화가 나서 붙인 지명이 아닙니다.

다윗은 기억을 더듬었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잊어버린 기억,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이런 나 대신 죽는 존재, 대속의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잊혀진 ‘대속의 은혜’를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오늘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육체의 감정과 땅의 결과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붙들고, 오늘 내게 허락된 믿음의 삶, 그 한 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생겨도 십자가를 통해 하늘의 가치와 하늘의 영원함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구원 받은 성도인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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