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13장 1~13절
1. 고린도후서의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라 내용이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문제 많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메시지 아니,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 거짓 복음 선동꾼들에게 속아서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십자가 복음’을 버리려 했던 고린도 교인들은 다시 그 심령과 삶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린도후서(고린도전서 포함)’가 전해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읽고 화가 났다면, 받아들이지 않다면 찢어버렸을 겁니다.)
오늘 읽어 보신 ‘13장’은 축약입니다. 특히, 그가 받은 모든 오해의 소지에 대한 해명과 이유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이용해 먹은 오해의 씨앗을 다시 불식시키는 내용입니다.
기억나십니까?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인의 마음에 사도 바울에 대한 불신을 집어넣기 위해 사용한 미끼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사도 바울의 화려하지 못한 언변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 어눌한 말솜씨가 아니었습니다. 절제한 것입니다. 자제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엎드려 제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거짓 교사들의 미끼는 ‘종교심 자극’입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종교성’을 자극하여 뭔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영적 뿌듯함’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와 율법 준수’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위에 말씀드린 두 가지의 달인이었습니다. 화려한 종교 지식, 지적 능력 등으로 인간의 종교심을 얼마든지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바보 같다는 말, ‘좀 모자란 것 아니야.’라는 평가를 받을 지 언정 그것을 함부로 휘둘러 대지 않았습니다.
2. 우리는 너무 단편적으로 성경을 대하려 합니다. 전체 속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걸러서 심령으로 말씀을 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끔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하지만, 책장을 뒤적일 뿐 ‘죄에 기울어진 내 본성’을 십자가에 붙들어 매는 인내와 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과정 없이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요? 이런 영적 갈등없이 고린도후서를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네, 그냥 책망, 훈계, 질타, 경고입니다.
특히 2절을 보십시오. 이 내용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네, “내가 몇 번을 경고했느냐! 그럼에도 여전히 죄 지은 사람들 조심해라.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로 보일 겁니다. 화난 사도 바울의 단호한 경고로 보일 겁니다. (저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시 곱씹어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사도 바울이 어떤 은혜를 통해 구원받았고, 변화됐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절은 정말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눅23:32)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전에 죄를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은 ‘예수 믿는다면서 도덕적, 윤리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죄를 지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프로아마르타노(proamartano)’는 ‘과녁(표적)을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악’은 ‘인간의 도덕, 윤리, 문화, 법률, 양심 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붙들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십자가의 과녁을 벗어난 범죄’일 뿐입니다.
또한 2절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가만 두지 않겠다’가 아닙니다. ‘용서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페이도마이(pheidomai)’를 굳이 번역하면 ‘애원하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번째 너희를 방문하면, 그때처럼 애걸복걸하듯이 하지 않겠다.” 혹은 “이젠, 그 전처럼 어리숙한 듯 말하지 않겠다. 더 단호하고 명백하게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어쩌면 이것도 안타까움에서 나온 표현일 것입니다. 3~10절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결국 다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셨지만, 가장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를 택하심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바울의 진심이 보입니다.
약한 것을 택함이 진정으로 강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강한 것, 잘하는 것,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십자가 못박힘으로 ‘약한 것’으로 바뀌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을 통해 당부했습니다. ‘너희의 강점을 맘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오히려 약함을 통해 일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고하여 높아진 ‘고린도 교인들’에 말입니다...)
또한 3~6절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천박해 보이는 십자가를 택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하셨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당신들 안에서 더 강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그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택해야 스스로 버림 받지 않은 자임을 증명하게 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끝까지 ‘십자가에 내려놓음’을 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고, 바보 같고, 버림 받은 자 같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이 유일하게 ‘선(善)’으로 여기시는 ‘십자가에 못 박힘, 내려놓음’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 만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왜 진리일까요? 예수라는 신적 존재가 진리라는 말일까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본문 아니 ‘고린도후서’를 통해 말씀하는 ‘진리’는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을 통해 내 자아의 판단 반대로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의 몸,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은 범죄한 인간과 같은 유혹에 시달리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십자가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금식하신 것을 무슨 능력 받으려고, 참선하려고 하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진짜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또 다른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십자가의 징검다리였습니다. 육체의 소욕 반대로 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유일한 뜻인 골고다 십자가에 순종하시기 위해, 그날 그 순간 내 앞에 닥친 것을 십자가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했고, 무엇을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또 어떻게 기도했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였습니까?
좀 느린 것 같아도, 내 생각과 반대인 것 같아도, 내 즐거움이 아닌 것 같아도 ‘십자가 앞에서 그것’을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를 엄하지 않게 대하시며, 진정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는 성령의 인도함이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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