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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2020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24장 1~13절

1. 이사야 24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범위가 ‘땅’, 즉 ‘온 세상’으로 확대됩니다. 성경의 예언을 대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록 당시로부터‘가까운 미래’ 혹은 비교적 ‘먼 미래’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을 기록함과 동시에 ‘인류 역사의 마지막 미래’ 즉, ‘요한계시록’의 심판과 회복까지 투영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24장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온 땅(세상)에 심판이 임하고, 그와 동시에 회복이 임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오늘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절과 3절에 기록된 ‘땅의 공허, 황폐, 지면을 뒤집어 엎음 등’을 단순히 ‘벌하심, 저주를 쏟아 부으심, 쓸어 버리심’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또한 2절을 신분질서, 경제체제 등의 붕괴로 귀결시켜서 6~13절에 기록된 ‘고통, 혼란, 혼동의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는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심판의 원인은 분명 ‘범죄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냥 범죄한 정도가 아닙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대속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셔서 베푸셨습니다.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5절)

‘언약(약속)’의 특징은 ‘지키는 것, 깨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을 먼저 깨뜨린 것은 ‘인간’입니다.

먼저 깨뜨림으로 ‘영원한 저주와 죽음’의 상태로 스스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시내산 언약’을 맺어서 사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율법을 통한 시내산 언약’을 또 다시 깼습니다.

따라서 6절의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에 ‘다시’라는 단어, ‘그러므로 다시! 저주가 땅을 삼켰고’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저주’라는 것을 쏟아 부으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언약’을 깨버리고, 다시 ‘저주의 상태’로 스스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3.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인간이 ‘영원한 언약’을 깨버림으로 피조물도 고통과 저주에 탄식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3~27절)

이것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범죄한 인간’이 다시 ‘영원한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절대 ‘조건’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선악과를 안 먹으면…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해준다’는 식의 ‘거래 조건’ 수준에서 이해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 조차 ‘계약 조건’으로 격하시킵니다.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대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구원 혹은 축복받기 위한 조건’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언약’에 묶이길 기뻐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디에 묶이거나, 붙들릴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범죄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까지 언약’에 묶이신 ‘그 사랑의 하나님’ 입장에서 ‘영원한 언약’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심판을 통한 회복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 찬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공허, 황폐, 뒤엎어짐’을 본다면 ‘진정한, 영원한 회복’을 위해 ‘심판의 요소’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끝까지 붙드는 가운데 새창조와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매일 매순간 삶의 곳곳에서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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