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2020년 수요일 묵상
- Hyung Yun
- 2020년 7월 15일
- 2분 분량
본문: 이사야 5장 1~17절
1. 오늘 본문 1~7절은 일반적으로 ‘포도원의 노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즐거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함축적이고, 비유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포도원의 노래’ 이후 기록된 8~17절은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돌아오라는, 돌이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을 거부한 뒤 맞이할 안타까운 일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또는 국가 공동체’를 ‘포도원’에 비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 됨’을 기뻐하셨습니다. 그 분이 심은 포도나무들이 좋은 열매,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길 원하셨습니다. 물론, ‘정의와 공의’는 ‘도덕, 윤리’의 삶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간의 삶의 결과물’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붙들 때 시작되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이루어지고, 맺히는 ‘열매’입니다.
2. ‘포도원의 노래 (1~7절)’를 살펴볼 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것은 ‘황폐함을 당하는 포도나무’의 입장에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황폐함을 당하는 포도원’을 바라보는 ‘포도원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포도원을 정결케 하여 다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붙들게 됩니다. 그 반대가 되면 “왜!?”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의문과 원망만 생깁니다.
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지중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속에는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 등의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 나고, 똑똑하고, 강해서 ‘극상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비천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시내산 언약)’로 붙들렸기 때문에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놓쳤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율법과 제사 규례’에 녹아 있는 ‘대속의 은혜’를 ‘종교행위, 규범’으로 생각했습니다. 못난 그들을 은혜로 택하여 주신 것을 ‘특권의식, 선민의식’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그대로 두실 수 없었습니다. 포도원을 갈아 엎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밭을 갈아 엎는 이유는 ‘다시 심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정결케 하여 반드시 ‘포도나무’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3. 또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심으신 포도나무’를 바벨론 70년 포로생활 이후 돌아온 ‘남유다 백성’, 다시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과 예루살렘성’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 다시 세워진 성전, 예루살렘성은 예표일 뿐입니다. 완전한 것을 향해가는 과정입니다.
저와 여러분 신약성경에서 ‘포도나무’로 비유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비유가 아니라, 자신이 ‘포도나무’임을 말씀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극상품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포도원 주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족 혹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진정한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오랜 종교생활로 인해 결국 ‘죄인을 향해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놓쳤습니다. 아니,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 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교만의 길, 멸망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 그 분 안에 거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 것 아닙니까? 심지어 답답함마저 느끼는 것은 아닌지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싶으십니까? 또 십자가에 자신을 올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심령을 낱낱이 비추십시오. 성령의 뜻에 이끌림 받기를 기뻐하십시오.
8~12절에 기록된 내용을 ‘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14절의 ‘스올의 욕심’보다 더한 ‘인간 본성의 입 벌린 탐욕’에 ‘먹힘’을 당하게 됩니다.
‘참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기 위해 나를 십자가에 드리는 것이 기쁨이 되시길, 그렇게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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