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1. 오늘 본문 속에는 사도 바울의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 드러납니다. 20절의 “언성을 높이려 함은”을 너무 과하게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식의 생각은 좀 접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진심을 느끼려면 드러난 감정 상태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12~19절, 특히 15절의 표현은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너희가 이럴 수 있는냐?!”라는 배신(?)의 감정이 섞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헌신과 노력은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기 힘든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뒤쫓아온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성 밖에 버렸습니다. 그런 일들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갈라디아 곳곳을 다니며 십자가에서 완성된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2. 갈리디아 교인들은 누구보다 이 사건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12절은 그때 그 고백과 나눔을 기억나게 하려는 사도 바울의 눈물 어린 표현입니다. “나도 너희도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살아난 존재들 아닙니까? 그렇게 우리 서로를 해롭게 하지 않고, 위하며 지내지 않았습니까?”라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녹아 있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13절의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에 주목해보십시오. 크게 두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흔히 그의 외모가 볼 품 없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돌에 맞아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을 것입니다. 오랜 전도여행으로 차림은 남루했을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도 바울의 언변입니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글을 잘 쓰지만, 말솜씨는 뒤쳐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모습에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14절). 심지어 ‘천사,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했다는 표현과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다(15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신격화가 아닙니다. 서로의 깊은 신뢰와 관계에 대한 극적인 표현입니다.
3. 이런 표현들을 보면서 자칫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는데, 내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거짓복음을 따라갈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런 마음의 태도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고대 기독교 저서’라고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성경’입니다.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마음으로 19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분명 성령의 음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내 자녀들아(4장 6절).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말아라(5장 1절). 종 노릇하며 살지 말아라.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다. 진정한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을 누리며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종교생활(종 노릇)을 그만 두어라. 다시 내게 돌아오너라. 너희를 살리기 위해 난 오늘도 십자가에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 어미가 죽음의 고통을 넘어 생명(아이)를 낳는 것처럼…”이 음성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4. 저와 여러분 죽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강하게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복’입니다. 15절의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에 대한 답에 우리는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복’으로 번역된 헬라어 ‘makarismo’는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복’따위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설명은커녕 성경이 말씀하는 ‘복’의 참 의미, 그 근처도 못 갑니다.
‘makarismo’는 성경에 딱 세번 사용합니다. ‘로마서 4장 6절, 9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 15절’입니다.
따라서 ‘로마서’의 용례를 살펴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의 축약과 같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로마서 4장’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간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사함을 받는 것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종교적 행위 혹은 도덕적 의로움이 아니라, 위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은혜(“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롬4:6)로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복’을 ‘makarismo’라는 단어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에게 믿음으로 베풀어지는 ‘복(makarismo)’라고 ‘로마서 4장 9절’에서 선포합니다.
‘복’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비뚤어진 ‘복’에 대한 생각과 개념이 성령 안에서 바로 잡히도록 기도하십시오.
세상의 것으로 오염된 영혼의 생각과 태도가 십자가에서 씻기고, 회복되는 것이 우리 남은 인생의 과제입니다.
더 이상 보이는 것들이 속이는 ‘복’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순간 마음 빼앗길 때 다시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저와 여러분 안에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을 뒤덮으려는 육신의 꺼풀을 매일 떼어내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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