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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2021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갈라디아서 4장 1~11절


1. 갈라디아서를 계속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무용론자’가 아닙니다. 율법을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의 오만하기까지 한 ‘자기 의로움과 종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또한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18).

율법을 통해 범죄한 자기 존재를 깨달은 인간들이 결국에 붙들 수밖에 없는, 붙들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대속의 은혜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인간! 십자가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은혜의 삶에 대한 결과가 ‘율법을 지키는 삶,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2. 이 진리를 위해 고민한 삶의 흔적이 ‘갈라디아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생생히 드러납니다. 결코 신학적 논쟁을 위해 이런 편지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2절도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로마사회의 ‘후견인 제도’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한 때까지”입니다. 즉, ‘초등학문’ 혹은 ‘후견인’으로 비유되는 ‘율법’은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효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가 차매(4절)” 하나님께서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초등학문) 아래에 종 노릇하던 사람들을 ‘속량(贖良, Redemption:십자가에서 죄인인 나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심)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율법 아래에서 종 노릇 하듯 종교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아들의 명분(지위)’으로 회복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1~5절의 내용입니다.

3.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종 노릇하던 사람’ 또는 8절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던 사람’은 유대교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종교를 믿었던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고 사는 사람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종교인들(유대교, 기독교 포함)을 향한 성령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4. 우리는 ‘종(slave) Vs 아들’에 대해 다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종’과 ‘아들’은 계급 혹은 지위가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관계 속에 녹아 있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종’과 ‘주인’은 힘의 차이에 의한 종속관계입니다. 그렇게 주인을 대하는 ‘종’의 마음의 태도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종’이 추구하는 것은 ‘이익(결과물)’입니다.

‘종’에게 두려움이 임하는 이유는 ‘종’이 추구하는 결과물 혹은 이익이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렇게 ‘종’은 늘 전전긍긍하며 일합니다. 말 그대로 ‘종 노릇’합니다. 딱 ‘노예의 수준, 마음의 태도, 삶의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자녀)’은 다릅니다. ‘주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압니다. 힘의 차이에 의한 종속관계가 아니라, 생명에 의한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기에 ‘이익(결과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나(자녀)와 하나님(아버지)’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5.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 오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신 생명으로 하나님과 자녀됨이 회복된 존재인지 아닌지를 점검 혹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네, 주어지는 것들이 없어져 보면 압니다. 누리는 것들이 사라졌을 때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없을 때 나의 반응을 보면 압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이런 고백을 드려봅시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 땅에서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최고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안으시고, 나를 품으시고,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저는 아버지가 너무 좋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 위에 기쁨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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