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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갈라디아서 3장 19~29절


1. 지금 묵상 중인 ‘갈라디아서’는 이해가 쉬운 성경이 아닙니다. 그저 덮어놓고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율법’을 폄하 혹은 무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하는 ‘사도 바울’ 못지않게 수신자인 ‘갈라디아 교인들’도 ‘율법’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그 고민의 과정에서 곁길로 흘러가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과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회심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을 때, 그가 주로 방문한 곳은 ‘유대교 회당’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과거 그가 통달한 ‘유대교 교리, 율법에 관한 지식’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율법(모세 언약)’으로 하였으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으로 마쳤을 것입니다.


2. 오늘 읽으신 본문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야 합니다. 적어도 15절부터 읽어야 합니다. ‘모세 언약(율법)’이전에 믿음으로 시작한 ‘아브라함 언약’을 언급합니다.

그래야,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완성된 ‘십자가 언약’이 언약의 정점이자 완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모세 언약’은 과정에 있는 것일 뿐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유대교 개종 기독교인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 행위 준수’를 통한 자기 의로움에 빠진 사람들, 그런 내용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 혹은 ‘유대교 선동가들’에게 “제발, 십자가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까지 유대인들에게 ‘시내산 언약’ 속에 담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행위)가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내산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은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종교성과 자기 의로움에 가득한 편협한 시각에서 ‘시내산 언약(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기억을 더듬도록 합니다. 16~18절을 통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시내산 언약’ 이전에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던 ‘아브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그렇게 ‘아브라함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 사이에 있는 ‘시내산 언약(모세의 율법)’의 기능(?)을 설명합니다. 그것이 16~22절입니다.

그의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율법’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도록 주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현대어로 요약해보겠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과 당신들의 생각엔 너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떠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이 ‘율법’ 앞에서 결국에는 범죄한 자기 실존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없지만, 만약 누군가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완벽히 지킨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단 하나라도 어긴다면 끝입니다(21절). 그래서 ‘시내산 언약’ 속에 ‘대속의 제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은혜로 대신 제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드리는 속죄의 제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의 일부를 지킴으로 솟구쳐 오르는 알량한 인간의 의로움을 버려야 합니다.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4. 이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합니다(24~25절). 이것은 결코 ‘율법’을 폄하한 것이 아닙니다. 첫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기능(?)이 ‘율법’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노력, 종교성 혹은 윤리적으로 라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것과 어디서 들은 말은 있어서 얄팍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관념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다릅니다.

초등교사를 거쳐 고등교사(?)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으로 인도함 받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하나 됨), 그리스도로 옷 입음, 진정한 세례(27절)’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세례(침례)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입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자아’,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거부하는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물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 생명’으로 산다는 선포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는 나, 그러나 예수로 다시 사는 놀라운 영적 신비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드러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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