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1. 오늘 본문 속에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된 과정, 회개하고 돌이킨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거의 2,000년 전 사건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6개월에서 3년 사이에 그의 회심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은 17~21절을 통해 회심한 자신의 여정을 간략히 언급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돌이킨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광야 생활)에서 3년 정도 지내며 전도했고, 이후 아레타 왕에게 쫓겨 ‘다메섹(시리아, 다마스커스)’을 거쳐(17절 및 고후11:32~33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15일을 머문 뒤(18절) ‘수리아’를 거처 ‘길리기아’에서 머물렀다고 말합니다(21절).
2.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요? ‘나 고생 많이 했다. 나,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16절). 내가 받은 사도권은 예수님에게 직접 받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11~12절). 등’을 강조하기 위해, 변론하기 위해 기록한 것일까요?
물론,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12 제자 중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겐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울(개명 전,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핍박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22~23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대 교회(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즉, ‘베드로, 요한 등’ 기존 ‘사도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한가지의 꼬리표가 있습니다. ‘변절자’입니다. ‘유대교인들’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변절자 중의 변절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쪽에서 의심을 받고, 저렇게 말하면 이쪽에서 의심을 받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3. 이런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읽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었는지, 붙들 수 밖에 없었는지가 조금이나마 느껴지실 겁니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떠난 ‘갈라디아 교인’을 향한 ‘사도 바울’ 더 나이가 ‘성령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이 아닙니다.
외로움, 고독, 아픔을 삼키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다시 불러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날카롭고, 얼어붙었던 자아가 녹아 내린 ‘사도 바울’의 뜨거운 눈물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 자신이 도무지 ‘십자가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신 속량하신 은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전인생과 전인격, 자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생을 ‘유대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것들을 먹이 삼아 살아가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판단하고, 그 분을 평가하고, 그 분을 경험했을 때는 ‘죽이고 싶고, 거절하고 싶고, 부인하고 싶었던 그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이 가려졌습니다. 멀어버렸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버린 정도가 아닙니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은 죽었습니다(사도행전 9장). 그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은 ‘십자가에서 죽은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도 바울’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사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요? 13절의 기록처럼 ‘너희(갈라디아 교인)가 들은 이야기, 너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네, 자신의 변화입니다. ‘이제 내 안에 내가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십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이야기를 나눌 때(밤을 새우며 나눴을 것입니다.)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떠오른 기억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는 ‘사도 바울’ 여전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모습으로 기록하는 ‘사도 바울’을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5. 이것이 편지의 힘입니다. 그냥 편지의 힘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고, 예배한 영적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편지의 힘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사도 바울의 편지(신약 성경은 모두가 편지 형식입니다.)가 성경이 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변화된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며, 그 기록을 읽고 변화된 사람들이 보존하고, 남겼기 때문에 성경으로 남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성경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은 이후 변화된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사람들의 기억속에 기록되야 합니다.
이제는 내 삶을 내가 기록해 나가는 인생을 살지 맙시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기록해 나가시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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