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15장
1. 출애굽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홍해 사건(출애굽기 14장)을 경험한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입니다. 감격에 찬 찬송입니다. 어느 복음 성가의 가사처럼 ‘다 표현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 감사, 놀람, 경외 등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출애굽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후의 여정이 진정한 출애굽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지점까지는 뭐가 뭔지 모르고 따라 나왔습니다. 얼떨결에 따라왔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담긴 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르라고 하니, 바르고, 나가자고 하니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워 떨었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경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진 홍해, 그 바닷길을 허겁지겁 건넜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를 본인들이 불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맹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감격에 차서 쏟아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2.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록 앞에서 이런 묵상을 하는 저를 이상하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찬물 끼얹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22절 이하를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불평, 원망이 쏟아집니다. 겨우 3일 지났을 뿐인데 말입니다. 지구 역사상 최고의 초자연 현상을 통한 하나님의 기적을 단 3일 전에 경험했던 그들입니다. 10가지 재앙까지 포함하면 그들이 경험한 초자연적 기적, 신적 능력의 체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 간사함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육체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몸으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축복과 기적도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과 능력을 베푸신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10가지 재앙, 홍해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단순하게 “나 여호와는 위대한 신이다. 나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한다. 저 애굽의 잡신들과 왕, 그 군대를 처단하는 위대한 나 여호와를 따르라. 나를 믿으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단편적 이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여호와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을 우상 대하듯 대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종교행위 더 나아가 무속행위로 숭배하게 됩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바로(Pharaoh)의 병거와 군대를 수장’시킨 하나님의 위대함(3~7절) 또는 ‘콧김으로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8~10절)’에 심취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인 그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당하는 현세의 어려움과 난관을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으로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많이 경험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붙드는 것은 ‘그 일의 해결’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적 능력’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3절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는 용사’라는 말은 ‘아주 강하다. 싸움 잘한다’는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염된 인간의 생각과 이성 속에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시다.”라는 것은 ‘전부’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입니다. 존재적인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세계(현세, 이 땅, 온 우주)에서 홍해보다 더 한 것이 수백, 수천 번 갈라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표현해 볼까요? 오늘 본문 전체에 기록된 찬양, 영광 등등은 ‘여호와’ 그 이름 하나로 함축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모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4. 모세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애굽기 3장 14절)”는 하나님의 자기 선포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짧은 지면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히브리어에서 ‘존재하다’는 의미의 ‘hayah’동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I am’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 혹은 다른 존재에 의해 존재가 규정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선포를 들은 모세의 충격이 상상이 되십니까? 인간이 갖다 붙인 온갖 이름의 우상이 넘치는 애굽, 그 중에서도 왕실에 살았던 그가 받은 영적 충격 말입니다.
네, 그랬던 그가 광야, 떨기나무 앞에서 ‘스스로 계신 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갖 우상이 넘치는 애굽’에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홍해를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모세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초자연적인 현상’을 찬송하고 싶어 이 노래(시)를 지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푼 어떤 현상을 찬송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그 분’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이름이시로다”는 표현이 없으면, 타종교의 신화속에 등장하는 노래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pan, 汎)이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only, 唯一) 이 진리입니다. (물론,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분, 홀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그 십자가!없으면 ‘기독교(이렇게 부르고 싶지 않지만…)’는 여타 종교와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고, 넘어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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