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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2021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1.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그 개인적인 이야기는 무용담이 아닙니다. 종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자기 고생을 강조한 말이 아닙니다.

(지난 수요 예배 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의 손은 오랜 노동(장막 만들고 수리하는 일)으로 온통 굳은 살과 터진 자국 투성이였을 것입니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조명과 조악한 기록환경 등등으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는 것이 고통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 한절(11절) 속에 담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범죄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 박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큰 글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다른 힘이 아니라, 이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사도 바울은 글로도,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에 녹은 사람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의 굴레 속에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종 노릇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회복된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다시 천천히 읽으시면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정리인 오늘 본문이 더 다가오실 것입니다.

12~13절은 다시 유대교 율법 행위(할례 등)를 강요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 없는 비난과 공격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에 스스로 얽매이려는 인간의 연약함, 그렇게 자기 의로움을 다시 붙들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심리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 은혜, 그 완전한 의로움만을 붙들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종교인들)에 대한 아픈 마음입니다.

여전히 ‘자기 의로움에 먹이를 주는 종교적 행위’를 목숨처럼 붙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안함, 두려움 때문입니다. 과거의 습관을 벗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과거 같은 종교 공동체였던 유대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비난(박해)을 덜 받으려는 계산이 깔린 것입니다. ‘저 사람, 나사렛 예수, 그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데… 뭐, 할례라도 받았고, 여전히 유대교 종교 절기는 잘 지키니 최악은 아니다.’라는 식의 알량한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이런 교묘한 인간의 마음, 종교심에 가득한 인간의 의로움을 잘 알았습니다. 그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득도한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그게 보였던 것입니다. 빛이신 그 분! 어두운 내 심령에 십자가 복음을 큰 글자로 새겨 주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는 않으면서 ‘할례’라는 종교 껍데기(베어내야 하는 것은 이런 종교 껍데기인데…) 뒤에 숨은 인간(특히, 하나님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기 착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뒤집어 쓴 종교 행위’의 껍데기(할례)를 남에게 뒤집어 씌워서 함께 자기 의로움의 수렁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함께함으로 죄책감을 덜려는 인간의 간사함을 그대로 지적한 것입니다.

4. 그렇게 사도 바울은 14절에 반전이자, 유일한 길을 제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절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흔히 말하는 “나, 개인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나,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라며,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종교적 행동, 성과, 업적, 말 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후에 뭐라 기록합니까? 네, ‘십자가에 못 박힘’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나를 통해 드러난 그 일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향한 칭찬에 묻어갈 수 있습니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높임을 내가 도둑질할 수 있습니까?


5.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는 죽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15절에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내 자아가 개선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다는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이것 만이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제발, 예수님 믿고 땅에서 잘된 것 등등이 간증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은 종교적 사명을 감당하다가 돌에 맞고, 채찍에 찢긴 고생과 고난의 흔적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와 자기 의로움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아가 십자가에 죽고, 나 대신 예수님이 사시는 증거!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항상 묵상하십시오. 특별히, 세상이 요동치고, 요동치는 세상에 내가 흔들릴 때 꼭 붙드십시오.

우리의 남은 인생을 바라보는 모두가 “저 분에게 남은 것은 세상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십자가 뿐이구나.”라는 진정한 심령의 인정과 고백으로 흘러 나오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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