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2021년 수요일 묵상
- Hyung Yun
- 2021년 9월 1일
- 2분 분량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10절
1.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로마서’를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 잘 담긴 성경으로 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의 압축본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첫번째 선교를 위한 길을 떠나서 십자가 복음의 공동체를 세운 지역(오늘날 터기 내륙지방)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 지역은 특별한 애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단(異端)사상이 침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율법주의 이단’입니다.
유대교 개종 기독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고질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유대교 배경의 율법 행위(대표적인 것이 할례였습니다.)를 함께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2.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율법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뒤가 바뀐 것이고, 목적과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즉, ‘죄인에게 베풀어진 값없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율법 행위’로 드러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기 위한 율법 행위(목적)’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의 당연한 삶의 결과물’이 율법 준수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자’의 표식과 같은 ‘할례’는 정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표식은 오히려 ‘종교 훈장’같은 치명적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할례 또는 율법 행위 및 종교 도덕 준수 여부에 따라 ‘구원’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십자가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도 안됩니다. 인간의 간사함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교묘함과 자기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오직 믿음,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십자가 복음,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을 가지고 자신의 위선적 삶을 포장하는 안타까운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을 내가 믿는 것은 자기 신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것! 그렇게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십자가 붙들게 하시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 그것이 복음의 출발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지만,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죽었음을 영혼 깊이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4. 대부분 ‘갈라디아서’의 시작, 1절을 ‘바울의 논쟁적(?) 태도’로 봅니다. 자신의 사도권(使徒權)을 비방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책망 내지는 사도권 변호로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정말 화났을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십자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감격하며 받아들인 그들의 변심에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심지어 사도(使徒)된 자신을 비난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배신감(?)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생각해봅시다. 첫 시작을 위해 고민하는 사도 바울의 진심, 이 글을 쓰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렇게 쓰면 너무 상처받지 않을까? 저렇게 쓰면 사람인 내가 드러나지 않을까? 제대로 못 받아들이면 어쩔까?”
제가 갈라디아 교인이라면 1절을 읽는 순간, 그렇게 10절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영혼의 터치를 받았을 것입니다.
“아, 맞다. 우리가 바울 선생님과 함께했던 그 날들… 예수님을 몰라, 그 분을 핍박하며 살았던 자신의 삶을 토해 놓았던 바울 선생님… 그렇게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십니다. 이 복음도 사람인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 바울은 이렇게 할 존재가 못 됩니다.’라며 고백했던 그 모습… 그렇게 함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 감격했던 그때를 잊었구나!”라며 영혼의 무릎을 십자가 앞에 꿇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편지입니다. 편지는 나눠 읽지 않습니다. 많이 바쁘신 줄 압니다. 그러나, 좀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따뜻한 커피 한 잔 옆에 놓고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바울의 분노가 아니라, 바울의 눈물,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읽으면 분명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육체의 숨을 쉬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갈2:20)이 참 생명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모두다 육체의 생명, 세상의 방법(종교적 미사여구로 포장된 인간의 방법)으로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십자가의 역설, 복음의 진리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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