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69편 1~18절
1. 오늘 본문(시편 69편)을 가만히 곱씹어 묵상해 봅니다. 종교인의 직분(?), 사명감 때문에 허겁지겁 읽어 내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보다 제 영혼의 유일한 양식임을 믿고 묵상합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성경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목마름으로 가득한 한 개인의 고백으로 말씀을 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증이 맞닿은 곳은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습니다.
감히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없는 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한순간도 숨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그 자체를 향한 영혼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아니, 그 간절함과 영적 갈망을 주셨습니다!”라는 탄식과 감사가 공존함을 깨닫습니다.
2. 여러분도 그러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주변의 어수선함, 내 속의 요동치는 마음을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특히, 3절의 고백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간절함입니다.
“목이 마르며”로 번역된 ‘charar’는 ‘불탄다’는 의미입니다. “쇠하였나이다”로 번역된 ‘kalah’는 ‘시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을 이것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이런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이런 영적 간절함이 있습니까? 죽음보다 더 강렬하고, 불 타오름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증이 있습니까?
제 자신도 이런 질문 앞에 함부로 ‘있다. 없다.’라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 질문이 저에게 다가올 때… 다시 엎드려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비록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아도 말씀이 우리 심령에 임할 때 함께 기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간절함은 ‘죄를 고백할 때, 죄를 덮어 주시고 가려주시는 은혜’로 이어집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영적인 태도와 영혼의 자세를 보십시오. 내가 왕으로 선택 받았다고, 내가 사울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에 비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내가 어떤 종류의 축복 혹은 달란트를 받았다고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우매함, 자신의 죄성, 자신의 연약한 본성, 자신의 치명적 약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될까 벌벌 떱니다.
이런 영혼의 태도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이런 영적 태도로 살았다면 지금 이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무엇보다, 저 같은 목회자들… 교회 안에서 선택 받고, 축복 받았다는 사람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5~6절의 태도로 살았다면 가슴 칠수 밖에 없는 그런 사건들이 발생했을까요?
4. 우리는 너무 자기 의로움에 취해 신앙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도 보았습니다. 9절을 중심에 놓고 7~8절, 10~12절을 펼칩니다. 그렇게 “나에게 ‘주의 집, 즉 하나님의 교회(조직교회)’를 위한 열정과 섬김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역하고, 충성 봉사하는데 사람들이 오히려 비방합니다. 욕합니다. 뒷담화를 합니다. 여러분도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충성 봉사하다 보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라는 적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적용하고, 이렇게 말씀을 이해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감히 제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그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시, 이 말씀을 각자가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구하며 읽어보십시오.
제 심령에 주시는 성령의 감동은 이것이었습니다. 1~3절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 5~6절의 탄식을 붙잡고 엎드린 제 심령이 이끌린 곳은 ‘겟세마네’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기도하신 예수님’에게 이끌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의 모든 수치와 비방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모든 발걸음을 비방하던 그들, 아니 십자가 은혜와 반대되는 삶을 살며 예수님이 비난 당하도록 살아온 저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 심령에 ‘하나님의 집, 생명의 집’이 다시 회복되도록 하시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향하셨습니다. 거기서 저의 모든 수치와 죄악, 욕을 대신 덮어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고, 너무 당연해서 맹숭맹숭해진 것은 아닙니까?
지금,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촉촉히 젖어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가 오늘 아침 첫 숨쉼을 느끼는 것보다 더 새롭게 다가온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집, 내 아버지의 집, 생명의 집’을 세우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열성, 그 뜨거움이 우리 삶을 이끌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