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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2020년 목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36장 1~22절


1. 이사야 36~40장의 배경은 남유다의 왕 ‘히스기야’ 때 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 36장과 37장은 B.C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략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볼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히스기야’왕에 대한 거품을 걷어내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군대를 멸절 시키셨다. 병에 걸렸을 때 벽을 향하여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라는 수학 공식 같은 선입견을 배제해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의 통치 전반기에는 아버지 아하스의 정첵을 그대로 이어 받아 친앗수르 정첵을 폈습니다. 그러다 통치 중반기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앗수르의 왕 ‘사르곤 2세’가 전쟁터에서 갑자기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를 이어받는 과도기에 앗수르에 정복당한 민족들이 봉기를 일으킵니다. 이 때, 히스기야 왕이 가담했습니다.

결국, 앗수르에 대한 반란은 진압됩니다. 반란이 진압됐다는 것은 앗수르가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처참히 짓밟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의 기록처럼 ‘히스기야 왕 14년(B.C 701년)’, 산헤립은 남유다를 비롯한 주변 모든 국가, 민족을 하나하나 평정한 뒤 산악지대에 있었던 ‘예루살렘’을 완전히 고립시킵니다.

열왕기하 18장의 기록처럼 지중해 연안 평야였던 ‘라기스’에 본진을 치고, 산악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에 ‘랍사게(앗수르, 관료 중 고위직을 나타내는 일반명사)’를 보내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 오늘 본문 ‘이사야 36장’의 내용입니다.


2. 그 내용은 치욕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받은 치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랍사게가 하는 말을 잘 읽어보십시오. 그의 말을 ‘감히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을 모욕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를 겁박해!’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4~5절에 기록된 ‘랍사게’가 전하는 ‘앗수르 왕(산헤립)’의 말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4절)”,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5절)”

이것을 “나 산헤립, 앗수르의 신이 네가 믿는 ‘여호와’보다 강한데, 너희가 감히 나를 반역하느냐!”로만 이해하면 하나는 보고, 둘은 못 보는 것입니다.

6~7절까지 연결하여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랍사게’를 통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여호와를 믿는다면서 애굽을 의지했다. 그것도 ‘상한 갈대 지팡이’로 전락한 애굽을!(6절)”입니다.

둘째, “너희는 나에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다’라고 말하지만,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는 너희의 신, 여호와의 말을 무시하고, 이미 산당과 이방제단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느냐! 물론, 그것들을 히스기야가 제거하긴 했지…(5절)”

다시 말하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여기저기 ‘어떤 것’을 주는 신적 존재를 쫓아다녔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믿는 신이 최고이고, 그 신의 대리자인 나 산헤립을 의지하고 따라라. 어차피 애굽 및 각종 이방신들도 의지한 적이 있는데, 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괜히 지금 와서 ‘여호와’만 의지한다고 너스레 떨지 말아라.”는 속마음이 4~10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걸 발견하지 못하면, ‘저 이방인 따위가 어디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느냐’라는 ‘종교적 공명심’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속칭, 골리앗 앞에 선 ‘분기탱천(憤氣撐天) 다윗 증후군’에 빠지게 됩니다.

3. ‘랍사게’를 통한 ‘앗수르 왕, 산헤립’의 말을 들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들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남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 분의 성품, 진정한 그 분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설령, 알았다 해도 ‘자아실현’이 아니라, 범죄한 자아를 십자가의 은혜로 못 박으시는 하나님은 싫었던 것입니다.

네, 앗수르 사람들이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대속의 은혜’를 남유다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니스록(앗수르의 신)’을 믿는 목적 즉, ‘번영을 통한 자아실현’을 위한 종교생활과 남유다의 그것이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안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보며 ‘저 사람은 예수, 예수 말은 하는데…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가 주는 ‘어떤 것’을 얻으려 종교생활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강력한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섬기고, 따르고, 예배하는 등의 어떤 종교적, 영적 행위 수준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하나님의 종(히스기야)이 선포한 메시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대적, 사탄, 마귀(산헤립, 랍사게)의 말’에 속을 것인가? 라는 적용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 본성 속에 있는 깊은 죄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또 도려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붙든다는 것! 복음을 깨닫는 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자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가장 실존적인 행위’이자, ‘진리의 행위, 생명의 행위’인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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