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63편 1~11절
1. 시편 63편은 익숙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다윗의 영적 갈망,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목마름, 영혼의 배고픔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편의 기록 장소는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표제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 광야’… 그곳이 어떤 곳인지, 왜 그곳에 있어야만 했는지… 상세히 설명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유다 광야’는 척박함의 상징입니다. ‘황량하다, 메마르다, 날카롭다, 뜨겁다, 거칠다 등’의 표현으로는 ‘유다 광야’의 어떠함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복장과 장비를 가지고 그 길을 걸어도 한 나절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 다윗에게 ‘유다 광야’란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게다가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겼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군대를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누군가의 ‘따돌림’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죽이기 위해 샅샅이 뒤지고, 쫓아다니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공포입니다.
2. 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절의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간절히 찾습니다!’가 이 시편의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표현, 흔히 우리가 ‘시적 표현’이라는 것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찬양 가사로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라는 이 한 문장에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 가득하던 우리의 마음이 녹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화려하고, 수려하고, 있어 보이는 것들을 원합니다. 뭔가 남다른 것을 원합니다. 교회도 나의 수준에 맞게 그럴 듯해야 합니다. 찬양곡도 세련된 멜로디와 가사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있어 보여야 합니다. 설교도 잘 짜여 진 강연 같아야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 축복, 은사 등도 특별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과 고난(?)도 특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달라야 합니다. 남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뭐가 되었던 내가 제일 특별해야 합니다.
3. 다윗도 특별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별함의 성격과 방향이 다릅니다. 지금 처한 내 상황의 특별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광야에서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저 사울이 얼마나 나쁜 자인지를 대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며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간절함,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할 뿐입니다.
이 표현 ‘물이 없어 마르고’라는 것을 다시 보십시오. 이것이 ‘마시는 물’이 없는 ‘유다 광야’의 상황을 표현한 것일까요? ‘내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 있는지 하나님 아십니까? 혹은 너희는 아느냐?’라는 표현일까요?
얼른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몇 번만 마음으로 읽어보십시오. 뒤에 나오는 기록을 보십시오.
‘물이 없어 메마른 유다 광야’를 표현하는 것도 맞지만, 궁극적으로 ‘물’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없이 영혼의 목마름으로 유다 광야보다 더 척박한 세상(땅)을 살아야 하는 자신을 고백한 것입니다.
4. 다윗은 늘 찾았습니다. 유다 광야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양을 칠 때도, 왕이 되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상황이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잘되고, 잘 나가고, 재미난 일, 다른 관심사가 생기면 하나님을 잊는 제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물론, 밧세바 사건 등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즉시 돌이켰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너무 잘 아는 표현이라 너무 쉽게 대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다윗 시대에는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일 것입니다. 성막 안의 ‘지성소(至聖所, Most Holy)’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과정… 네, 물두멍과 번제단을 지나야 합니다.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더욱이 ‘지성소’는 대속죄일에 대속의 제물로 드린 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분과 하나됨을 경험한 것입니다.
5. 그러니, 3절의 ‘주의 인자하심(헤세드, Hesed)’의 은혜가 생명보다 낫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것입니다. 범죄한 나 대신 제물(예수 그리스도)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임재를 허락해주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죽음의 상황에서 구하고, 찾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 하나님 말씀은 제가 감히 고백하고, 붙들고 기도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함부로 성경의 인물이 겪는 상황과 저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할 때, 저에게 주신 말씀임을 믿고 붙들게 해주시는… 긍휼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길에 하나님의 말씀이 참 생명과 능력, 빛이 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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