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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2021년 목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63장 1~14절


1. 오늘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에돔’에 대한 복수(원수 갚음)와 ‘이스라엘’에 대한 은총(구원, 회복)이라는 이분법적 이해에 머물 수 있습니다.

‘에돔’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했던 민족이자,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요르단’ 남쪽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돔’의 근원은 창세기 야곱의 이야기(창세기 25장 21~34; 27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돔의 조상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입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태중에 있을 때부터 다투었고 출생 이후에도 다툼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며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오바댜 10~14절’을 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할 때 에돔 사람들은 바벨론 편에 서서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고, 기뻐했습니다.


2.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선언은 당연합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 원수 갚아 주심은 억울하고 답답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령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저 원수같은 에돔에게는 보복! 나에게는 은총!’이라는 내면의 울분을 충족시키는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참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속상한 것도 많습니다. 그럴 때 이런 본문을 읽으며 위로를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에는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에돔’을 적대적 감정으로 대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이 숨어있습니다.


3. 하나님은 복수와 되갚음을 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1~3절의 기록처럼 칼을 빼 들면 처절하게 짓밟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4절 하반절 이하 속에 있습니다.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구속(救贖, redeem)’은 ‘구속(拘束, imprison)’이 아닙니다. 잘 아시는 ‘값을 대신 지불하고 용서하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구속(救贖)’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가알(gaw-al)’은 ‘보복(revenge)’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네, ‘십자가 대속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죄악을 담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5절의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와 연결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쏟아져야 할 성부 하나님의 모든 분노와 저주를 대신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을 붙들어 매심으로, 못 박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신 언약, 대속의 은혜 안에 있는 그 언약을 ‘에돔’에게 선포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언약 안에 있는 우리는 ‘에돔’같은 그들에게 이 은혜를 선포해야 합니다.

말이 아닙니다. 입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닙니다. ‘하는 척,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은혜로 드러난 내 모습, 십자가 은혜로 변화된 내 모습, 내 속에 ‘토끼 한 마리(어제 나눴던 묵상, 수요 예배 시간에 나눈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태양에 비췬 달 표면의 토끼 한 마리…)’가 보이는 것을 통해 십자가 생명의 은혜가 흘러가길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더 냉엄한 말씀을 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절을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됩니다. 9절과 10절의 연결고리,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옛날 ‘모세의 때’를 기억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건너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요단 동편, 에돔 변방’을 지날 때, ‘에돔’은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목격했습니다.

‘에돔(세일)과 싸우지 말라.’며 자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신명기 2장 1~6)를 들었습니다. 아니, 그 메시지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대속의 은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절됐습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관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월감, 박탈감, 상처, 교만 등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이 그들 관계 속 뒤섞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내다버렸습니다.

이런 ‘에돔, 이스라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은혜의 강가, 생명의 깊음, 은총의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13~14절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마무리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 부르심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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