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23장 1~18절
1. 이사야 23장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으로 매우 부유했던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또한 단편적으로 ‘부유함을 자랑하는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로’와 ‘시돈’이 누리는 ‘부유함’을 내심 부러워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싶었던 ‘남유다(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난 큰 원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 이방신에게 마음 빼앗긴 이유입니다. ‘바알 신’으로 대표되는 우상과 차마 버리지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함께, 겸하여, 교묘히 섞어서, 섬겼던 이유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육체로 누리는 물질의 풍요와 명예’ 때문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로’와 ‘시돈’에 관하여는 ‘예레미야서’를 살펴볼 때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현대의 ‘레바논’에 위치한 해안도시 국가였습니다. 특히 ‘두로’는 해안에서 약 0.5 마일(700m) 떨어진 섬으로 ‘천혜 요새’이면서 ‘무역항’이었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지중해 전역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펼쳐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고대 지중해 연안과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페니키아 문명(알파벳 최초 사용 등)’의 중심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근접한 다른 도시국가로 보기도 하지만, 바다를 사이에 둔 같은 ‘도시국가’로 보기도 합니다. 즉, 두로는 섬에 세운 ‘요새 및 항구’이고, 시돈은 마주보는 해변에 있는 ‘도시(성)’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1절과 10절에 등장하는 ‘다시스’는 지중해 끝, 오늘날 스페인의 지브롤터 해협 주변에 위치한 도시국가입니다. 네, 요나서에 등장하는 그 ‘다시스’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2~3절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이 해상무역을 통해 얼마나 막대한 부를 누렸으며, 4절에 그들이 거주하던 ‘바다의 요새’가 얼마나 튼튼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런 풍요와 번영을 누리던 그들이 한순간에 멸망합니다. 13절의 ‘갈대아 사람’은 ‘앗수르’와 ‘바벨론’ 모두를 의미합니다. ‘두로’는 ‘앗수르’의 공격은 간신히 버텼습니다. (해변 도시는 정복당했지만, 섬으로 된 ‘바다 요새’는 견뎠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합니다.
3.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것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바다의 요새’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이듬해인 BC 585에 포위 당합니다. 그렇게 약 12년을 버티다 BC 573년에 함락당합니다.
바로 이 때, 남유다의 멸망(BC586)과 포위당한 BC 585년, 그 짧은 한 해 사이에 해상무역 경쟁국인 남유다왕국의 멸망이 자국의 상업적 이익이 된다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에스겔 26장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예루살렘)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라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직시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누리는 축복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는 ‘증명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땅에서 얻고, 누리는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나와 함께 하는 절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우리의 유일한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게 됩니다.
땅에서 누리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축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땅에서 누리는 ‘상대적, 일시적 축복’이 주는 편리함, 편안함, 뿌듯함, 달콤함에 취해 영원한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은 것이 진정한 ‘성도의 참 모습’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