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1.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고, 경험할 고난에 관하여 다시 기록합니다.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볼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범위, 이유, 원인 등등은 정말 다양합니다. 때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고, 기간도 모호하며, 단회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의 타락’이 고난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등 떠밀어 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고난의 원인을 돌리는 것도 자기 책임을 벗어나려는 교활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돌이켜 회개하며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2. 오늘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고난(고통)의 결과물’을 ‘예수님을 잘 믿어서 받는 종교적 연단’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해석하고,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12절의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 13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14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함”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라오는 ‘종교적 연단, 훈련, 수행, 수련, 단련’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연단’이 끝난 뒤에는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도 높아지고, 나도 덩달아 높아지는 멋진 결과물’을 예상합니다. 종교 상장, 훈장, 표창, 상급 등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해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12절의 “연단하려고”입니다. 사실, 헬라어에는 “연단하려고”라고 번역해야 할 단어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험”입니다.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peirasmos는 ‘유혹, 꾐’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것도 ‘죄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예수님을 믿어도 ‘죄의 유혹’은 여전하다. 그것을 이상한 일 당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라.”가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13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극한 고난, 박해, 핍박, 순교’를 감당한 ‘종교적 헌신’으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믿고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내 육체와 전인격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어제 읽으셨던 4장 1~2절과도 연결이 됩니다. 성경 전체가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3. 혹시, 여전히 마음 속에 14절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는 자로다”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으십니까?
그럼 어제 묵상하셨던 ‘베드로전서 4장 4절’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상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방탕한 삶을 위해 자기 의로움에 기반한 도덕 행위를 비방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정욕에 이끌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선택한 것을 비방합니다.
세상은 ‘도덕군자’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자아를 버린 사람’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때론 비방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라 여기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상한 종교적 의로움’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됩니다. 섣부른 내 판단을 버리고, 반드시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원인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유혹의 원천, 걸려 넘어진 자아, 다시 일으키시는 십자가 능력’을 분별해야 합니다.
유혹의 원천인 사탄은 대적해야 합니다. 걸려 넘어지는 자아의 정욕은 피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은 19절의 고백이 바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 선을 행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아가 못 박힘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모든 유혹에 대하여 반응하는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참 아프고, 고통스럽고, 가장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 주신 “창조주(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함, 신뢰할 만 함)”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이 참 기쁨이 됩니다.
고난의 이러함 저러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살리시는 능력에 기대어 늘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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