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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2020년 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1. 주말 동안, 베드로전서 2장 3장의 권면을 읽으며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솔직한 우리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아닌 십자가 앞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붙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죄악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0절’을 통해 함께 나눴던 영적 메시지와 계속 묵상 중인 ‘베드로전서’ 속에 담긴 메시지의 흐름이 같은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제는 성경에서 ‘선을 행함, 의인, 선한 양심’ 등의 단어를 보실 때 ‘나의 의로운, 선한, 착한 행동’ 혹은 이런 행동을 함으로 ‘상대적 의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실 겁니다.

마음에 새기기 위해 다시 말씀 드립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선함, 의로움’은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입니다. ‘예수님을 시인(是認, acknowledgement)’하기 위해 죄악된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시작인 13절 역시 이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는 ‘십자가에서 네 자아를 부인하기 위해 못박혀 죽으면 나를 비난하고 공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참소와 비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14~17절은 ‘십자가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고,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함으로 ‘나의 의로움’이 아닌 ‘예수님의 의로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비방과 비난을 견디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17절의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과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를 위한 헌신, 봉사, 희생’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니까 많이 받을 수록 좋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식의 해석이 ‘종교적 자기 의로움’에 바탕한 해석입니다. 아주 위험하고, 스스로 속기 딱 좋은 종교적 착각입니다.

17절에서 “선을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자아, 죄성, 의로움 등을 못 박는 것’이 아니라면 18절 이하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오해와 착각의 대표적인 예가 또 있습니다. 19절을 ‘연옥 교리’의 근거 구절 중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떨어질 정도는 아닌 사람들, 즉 적당히 선을 행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있는 ‘연옥’이 있다. 그곳의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려면 후손들의 선행, 헌신, 희생, 봉사 등이 더 쌓이면 된다.”는 식으로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말이 좋아 ‘선을 행함’강조이지, 결국 사람을 윤리를 바탕으로 한 종교성에 묶어 둠으로 이용하고,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전우주적 사건입니다. 지옥이건, 천국이건 그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 구원’이 알려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다만, 이 선포가 ‘지옥’에는 알려질 뿐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대속의 은혜’는 계속 선포되었습니다. 20절의 기록처럼, ‘노아의 날’에도 ‘방주의 문을 활짝 여시고, 생명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은혜를 믿지 않고, 던져버렸습니다.

지금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계속 선포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붙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선을 행하십시오! 먼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선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그 분의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 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함, 의로움’인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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