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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2022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히브리서 4장 1~13절


1. 히브리서는 이해하기 쉬운 성경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배경이 없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대교에 정통하거나 적어도(2,000년 전) 제사장 혹은 레위인들이 가졌던 구약성경 지식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 생각입니다. ‘죄인인 나 대신 죽는 존재’를 통해 구원 받는 ‘대속의 제사’의 참 의미를 잊지 않으면 됩니다. 대제사장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은 존재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네, 3장 1절의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를 붙들고 읽어가면 됩니다.

히브리서는 말 그대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인(유대교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대속의 제사를 구약성경을 증거로 하여 증명한 성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히브리인’이라는 혈통 또는 ‘유대교’라는 종교적 전통에 의해 구원(안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 완성하셨다!’는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선포한 성경이 ‘히브리서’입니다. (11장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오늘 읽으신 본문은 3장의 내용과 계속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안식으로 표현합니다. 사실 ‘구원’은 ‘안식’이 맞습니다.

단순하게 어떤 어려움 혹은 힘든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죽어서 ‘뭔가 좋은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구원은 ‘Salvation’이 아니라, ‘Rescue(구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 구원이며, 안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 그 안식을 표현한 다윗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의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편 2절)라는 안식을 향한 다윗의 간절함이 생각납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뭔가 두려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3장 17절)을 이야기하면서 안식(구원)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불안함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기록자(사도 바울이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성경 속에 그 증거가 없기에 ‘기록자’라고 표현하겠습니다.)는 그런 의도로 1절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대속의 제사, 종교 행사가 아닌 ‘그 대속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지금까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안식을 누렸다.”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의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에 관한 두가지 견해를 알아야 합니다.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완성하시기 이전에 ‘구약적 관점의 대속의 은혜’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2절의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에서 말하는 ‘믿음’은 3장 1절을 함축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6절의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에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대로 순종하여 ‘유대교 종교’를 버리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오늘날도 많이 듣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십자가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너무 드뭅니다. 어제 믿은 믿음! 어제 못 박힌 십자가로 오늘을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제 신앙’으로 사는 ‘오늘 종교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7절이 이런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전히 ‘구약적 종교관(어제)’에 묶여 ‘오늘주신 십자가 복음(신약의 구원)’을 놓치는 것에 대한 탄식입니다.

어쩌면 오늘날도 ‘신약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복음’을 오늘! 내 삶에 실제로 다가오지 않음으로 ‘신약(New Testament)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원(안식)과 생명’을 ‘구약(Old Testament)에 나타난 종교’로 전락 시키는 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앗차’하는 순간 제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1절 이하를 붙들고 더 기도합니다. 살아 있고 활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제 영혼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며 모든 생각과 전인격을 수술하시는 말씀의 검을 저에게 갖다 댑니다(12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가 드러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믿고 엎드립니다(13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안식, 그 영혼의 참 맛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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