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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2020년 금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15장 1~9절

1.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리적 배경이 필요합니다. 물론,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이런 역사, 지리, 문화 등의 배경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한 개인, 공동체, 전 우주) 속에서 분명히 일하셨고, 일하고 계시고,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좀 더듬어보면 예전 ‘예레미야’를 살펴볼 때 ‘모압의 심판’을 다뤘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겹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선지서’에 차이가 있다면, 기록 연대에 있어서 ‘약 120여년’ 앞서는 ‘이사야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돌아오라는 간곡한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기에 ‘남유다’와 ‘주변 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바로 이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모압’을 비롯한 주변 이방민족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앗수르와 바벨론 등 침략국 군대는 주변을 복속 시키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제국을 이루려는 강대국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정복합니다.

모압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압은 북쪽으로는 ‘암몬’, 남쪽으로는 ‘에돔, 서쪽으로는 이스라엘을 경계로 합니다. (인터넷으로 검색이 가능하시면 지도를 참고 하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또한 모압 족속은 ‘롯의 아들 모압’에 의해 생겨난 족속입니다. (창 19:37) 이후 모압 족속이 성경에 등장한 것은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이교도 선지자를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민22~24장) 또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모압 땅, 싯딤’에 있을 때 ‘음행의 죄(바알브올 사건)’을 일으킨 족속입니다. (민25장) 그 이후 ‘사사시대’, 그 중에서도 ‘룻기’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다윗왕에 의해 정복당하기도 했으나, 호시탐탐 이스라엘의 약점을 찾아 공격했습니다.

결국, ‘모압’에게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멸망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네, 한마디로 ‘잘 됐다. 고소하다.’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포위를 당한 ‘히스기야 왕’ 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후,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 공격당하며 어려움을 겪던 약 2년간 또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이런 모압을 향해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멸망이 “하룻밤”에 들이 닥칠 것을 말씀합니다. (1절)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1~4절은 모압 북부지방, 5~7절은 모압의 남부지방, 8~9절은 모압 전역을 뒤덮은 ‘곡소리’를 기록합니다.


3. 오늘 말씀의 ‘모압’을 보면서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에 대한 해묵은 ‘이런저런 감정, 유감 등’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에 대한 경고를 듣지 못했습니다.

특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는 ‘예루살렘’이 제발 함락당하고, 멸망당하길 간절히 바랬을 겁니다. 그 옛날 ‘히스기야왕’때 18만 5천명이 ‘하룻밤’ 사이 죽임을 당하고 돌아간 일이 다시는 없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바보입니다.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의 군대가 전멸 당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인데,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 시키면 그 칼끝은 ‘모압’을 향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 ‘모압’은 예루살렘 멸망(B.C. 586)후 약 4년 뒤인 B.C 582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정복 당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압 족속’처럼 행동합니다. 자기도 언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지 알수 없으면서 ‘남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남 사정’에 관심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아닌, 남 사정’을 참 많이 살핍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의 특징은 ‘내가 십자가 붙들고 살 길’을 찾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사는 것’에 제일 먼저 관심이 있습니다.

‘영적 민감함’은 뭘 족집게처럼 알아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있는 십자가에 대한 민감함, 나를 살리시기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에 대한 민감함, 나의 죄악에 대한 민감함이 진정한 ‘영적 민감함’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매일 매 순간, 나를 십자가의 은혜로 초청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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