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2020년 목요일 묵상
- Hyung Yun
- 2020년 7월 30일
- 2분 분량
본문: 이사야 14:24~32절
1.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4~27절은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며, 28~32절은 블레셋에 대한 심판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앗수르’의 왕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까지 허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왕이 교만하여 도를 넘었습니다. 그렇게 ‘남유다’를 정벌하러 나섭니다(이사야 15장).
그렇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하룻밤에 18만 5천 명의 군사가 죽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앗수르로 돌아가 암살 당합니다.
그러나, 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주권에 의해 강대국 앗수르의 군대가 전멸한 사건, 그 자체에 함몰되면 곤란합니다. 계속 말씀 드리는 ‘영적 우월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심판과 저주받을 저들, 건짐과 보호받을 나’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지게 됩니다.
2. 오늘 본문을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블레셋(역사적으로 항상 이스라엘을 공격했음)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정복함으로 높아진 마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 ‘앗수르’와 ‘블레셋’에 대한 심판으로 가장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네, ‘남유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멸망 당함)
결국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앗수르와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3. 우리에겐 ‘영적 민감함’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래야, 겉으로 드러난 큰 것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 숨어있는 생명, 복음,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을 들을 때, “야, 하나님께서 저 이방족속 앗수르를 심판하신다네~ 팝콘을 튀겨라!”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정말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시기는 남유다의 왕 ‘아하스’ 때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막 즉위한 때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고관들과 남유다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특히 오늘 말씀)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앗수르가 주변 민족들(대표적인 것이 블레셋)과 ‘남유다’를 침공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유다 왕과 백성’들에게 오늘 말씀, ‘앗수르, 블레셋에 대한 심판’은 너무 큰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저들에 대한 심판’이 결국, ‘나에 대한 구원’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전히 죄인인 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멸망 앞에 서 있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히스기야 왕’ 이후 다 잊어버립니다. 다시 원위치 됩니다.
저들의 대한 심판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의 심판에 박수를 치면 안 됩니다. 특히, 영적인 우월함을 느끼는 사람일 수록 나를 힘들게 한 상대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의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첫째, 그런 일을 당하는 원인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를 공격해서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바로 안 해서 그렇다. 죄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등의 생각 자체가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잊은 교만한 자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면 그렇지’라는 식의 생각에 도취되면, 내 앞에 있는 ‘구원’을 위한 기회와 역사를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그대로 남유다로 진격하여 멸망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받는 심판을 보며 혹시라도 마음에 ‘고소미’가 한가득 올라오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 다시 십자가로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허락된 ‘구원’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영적 민감함’은 무속인의 신통함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작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고 붙드는 것이 진정한 ‘영적 민감함’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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