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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2020년 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12장 1~6절


1. 주일에 살펴보신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줄기’ 즉,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남은 자’에 대한 구원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문자 그대로 ‘혈통적 후손’ 혹은 ‘선택 받은 남은 자’에 대한 구원에 함몰되어 ‘선민의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유대인들은 이런 ‘선민사상’에 심취해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이런 ‘종교적 자부심’을 더 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항상 말씀을 대할 때 조심스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런 마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이사야 12장’은 말 그대로 ‘죄인이지만, 아무 공로 없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 받은 사람들, 남은 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영혼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택하심’은 죄인이 죗값을 치른 것에 대하여 어떤 자격을 부여 받아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은 멸망으로 끝나도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선하심에 따라 멸망을 위해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회복과 구원을 위해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12장 전체에 흐르는 감사는 심판 받아 끝나도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이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회복과 구원’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마지막 남은 그루터기’, ‘이새의 줄기에 솟아오른 연약한듯 보이지만 생명력 넘치는 싹(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와 감격, 찬양’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1절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는 뭔가 피해갔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쩌면 어리둥절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하는데, 아니 죽었는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상태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에 대한 불신이 아닙니다. 꿈이진 생시인지 뺨을 꼬집어보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2~3절의 고백처럼 죄로 인해 나도 모르게 시달리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 죽음이라는 최후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가야할 인간 실존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절망의 우물’에서 ‘죽음의 물’을 마시는 운명에서 ‘구원의 우물에서 생명의 물’을 길어 마시는 운명으로 바뀐 것에 대한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우물, 십자가 아래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우물’을 맛본 사람이라면 어찌 4~6절의 찬양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3. 지금 내 상황의 어떠함, 내 자신의 어떠함에 묻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내지르는 소리, 끌어당기는 땅의 현실에 두려움으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처한 상황, 그가 살았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현실,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바람 앞에 촛불, 풍전등화였습니다. 당시의 전쟁은 오늘날의 전쟁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때의 가난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질병은 원인도 모른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의 예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통한 완전한 구원 등이 이제 더 이상 ‘유일한 소망, 참 기쁨의 소식’이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너무 ‘기댈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좀 상세히 말한다면 ‘돈’으로 압축되는 ‘세상의 물질, 기술, 시스템 등’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내가 ‘기댈 것들’을 채워 주시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해서 그렇습니다. 일단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 놓고, 그 이후 주어질 ‘다양한 축복’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정말 좋으십니다.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풍성함, 은혜, 축복, 긍휼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풍성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도리어 ‘요구’하지 않습니다. ‘참 구원의 우물, 생명의 우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수’를 마시는 것으로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풍성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우물’에서 서성이며, 헛된 것을 구하던 우리가 성령의 인도 따라 ‘참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길어 올리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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