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9장 8~10장 4절
1. 오늘 말씀은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을 선포가 있은 뒤,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북 이스라엘로 집중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안타깝게도 북 이스라엘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선포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고 회개하며 돌이켜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이 원하는 길로 가다가 ‘전쟁, 환란’을 당했음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더 패역한 길, 망하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역사적으로 ‘아하스’ 왕 때 예언된 ‘임마누엘’ 예언과 ‘평강의 왕, 한 아기’의 예언이 대략 BC 734년 경이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것은 BC 722년입니다. 즉, “너희를 여전히 사랑하고, 함께 하고 싶어하는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는 간절함을 무시한지 약 12년만에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2. 오늘 말씀 9~10절을 보시면, 북 이스라엘의 교만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은 그들의 ‘가진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비옥한 토지, 많은 인구, 교역이 용이한 지리 등으로 인해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유다 보다 부강했습니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하기 직전의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는 약 41년을 통치(BC 790~750)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는 등 ‘북이스라엘’을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2세’의 사망 이후 ‘북 이스라엘’은 급전직하로 떨어지면서 ‘내부의 반란, 외세의 침입’ 등 엄청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잘 나갈 때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절대 나를 떠나지 말라고, 힘이 있을 때 더 조심하라고, 눈에 보이는 축복은 내가 함께 한다는 영원한 보증 수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죄를 회개할 때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할 수 있다. ‘임마누엘’할 것이다. 너희를 위해 완전한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실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라.”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13절의 기록처럼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5~17절을 보시면, 돌아오지 않는 북 이스라엘의 중심에 ‘종교,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3. 대속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말을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을 말하면서 자신은 ‘그 십자가’에 못 박힘을 택하지 않는다면 위선, 속임수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하시느냐 아니냐는 ‘어떤 종교인이 행한 업적, 감당한 사명, 받은 축복 등’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칭찬, 찬사’ 따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회개의 삶을 살고 있는가?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힘을 택하고 있는가?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가?’로 하나님과의 동행함은 증명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싫어 버린 ‘범죄한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나 대신 사시는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만약,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믿음으로 바라볼 때, ‘내 생각 포기되고, 내 주장 내려놓아지고, 내 욕심 버려지며, 이것이 참 기쁨이 되는 것’만이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영혼의 눈을 뜨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혼의 목소리로 예수님을 찬양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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