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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2020년 수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이사야 9장 1~7절



1. 오늘 본문은 7장 14절의 ‘임마누엘 예언’이 더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동행)가 거둬짐으로 짙은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빛, 그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정확히 예언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지역까지 구체적으로 예언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2. 본문 1절의 ‘스불론, 납달리, 해변 길, 갈릴리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쪽이면서 오늘날 시리아 남쪽에 위치한 ‘아람’의 침입과 지배를 수시로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변방, 변두리, 위험지역, 소외 지역’이었습니다. “옛적”으로 표현되듯,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항상 멸시를 당했습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된 것입니다. 2절은 시적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구원과 회복’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날(사망의 그늘에 앉아)’이라는 제목의 복음송의 가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3절은 ‘흑암’에서 비추인 ‘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경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을 부정적으로 이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리품’을 나누는 군인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4절의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 7장에 기록된 ‘기드온’의 미디안 격퇴를 기억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은 ‘미디안 연합군’의 침공을 불러왔습니다. 기드온을 중심으로 다시 회개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승리하여 압제자 미디안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 사실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셨습니다.

5절은 ‘승리, 회복,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전투에서 돌아온 모든 군인들이 ‘정결 의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죄사함을 통한 참 승리와 회복, 평안’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듯 표현한 것입니다.

6~7절은 “한 아기”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 정체성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라는 것은 ‘모든 다스림과 통치의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정사’로 번역된 ‘misrah’는 ‘다스림, 통치’의 뜻을 가집니다.

“기묘자라(wonderful), 모사라(counselor)”는 히브리어 ‘pele yaats’인데, 이것은 ‘놀라운 일을 기획하는 자’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원어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평강의 왕(통치자)”로 오신 예수님, 다윗의 혈통으로 진정한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 예수님에 대해 기록합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이 사람의 의로움, 계획, 방법, 어떠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3.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아기”라는 것에 마음이 쏠렸습니다. 죄악된 인간 실존과 세상을 대표되는 ‘흑암’에 짓눌려 고통 당하는 우리에게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갓 태어난 자녀 혹은 순수한 아기’가 왜 사랑스럽고, 좋습니까? 그냥 좋습니다. 아기에게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존재로 좋습니다. 심지어, 그 아기가 커서 나에게 이런 저런 것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를 아무 조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패역한 인간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죄인인 우리 존재를 그대로 사랑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시, 시간이 지나면서 ‘전지전능한 예수님, 슈퍼스타 예수님, 내 소원 이뤄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기’처럼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것 같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죄인의 패를 붙이고 죽으신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변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순수하게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을 순수하게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기독교인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드러난 ‘행위의 도덕’보다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우선입니다. 네, 우리 신앙의 순수성, 십자가 복음에 대한 순전함, 온전함이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회복은 부흥으로 포장된 기복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순수함이 회복됨으로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영혼과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모든 흑암이 물러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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