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8장 9~22절
1.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종교생활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거듭남,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인간의 가장 고상한 행동은 ‘종교생활’, 딱 거기까지 입니다.
9~10절은 인간의 어떤 노력, 어떤 계획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결국 물거품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1~13절은 이런 어리석은 인간의 길로 가지 말 것과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별하라는 말씀합니다.
14~15절은 갸우뚱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소’가 되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걸림돌’이 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바로 이부분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2. 14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변덕(?)이 심하셔서, 어떤 때는 ‘성소’가 되시고, 어떤 때는 ‘걸림돌’이 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덕(?)으로 인해 ‘이랬다 저랬다’한 것입니다.
‘성소’는 성전의 핵심 장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스라엘 두 집’, 즉 ‘남유다, 북이스라엘’에게 ‘걸림돌’이 되어 버립니다. 심지어 ‘함정과 올무, 덫’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철저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낮은 자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민의식’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종교적 우월감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붙들어야 할 ‘대속의 은혜’는 지겨워지고, ‘눈에 보이는 축복’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며 으르렁거렸습니다. 대체 자신들이 무엇이 잘못되어 남북으로 갈라졌고, 전쟁에 시달리고, 강대국에 위협을 받는지 몰랐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이 ‘돌아오라. 회개하라. 멈춰라.’는 메시지를 전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는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저 여호와’만 없으면, 우리도 이방신, 저 ‘강대국의 신’을 섬길 수 있는데…”라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실제, 남유다, 북이스라엘 모두 성전에서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3. 나의 죄인됨! 이런 죄인인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놓치는 순간, 누구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걸림돌’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천국이라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어마어마한 신적 존재’, 거기다 덤으로 ‘이 땅에서 축복을 주시는 초월적 능력의 소유자’ 정도에서 받아들이면, 누구도 예외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때마다 바꿔 그리는 ‘부적’ 수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철저히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자아가 못 박혀 죽는 것’이 더 이상 싫어지면, 지겨워지면, ‘멸망하는 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물론,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도’가 지겹거나, 싫어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16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심령에,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심령이 드러나야 합니다. 찔려야 합니다. 아파야 합니다. 무엇보다, ‘찔리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걸림돌’이 아니라, ‘성소’가 되기 위해 거쳐야할 것이 있습니다. ‘번제단(죄를 태움)과 물두멍(죄를 씻음)’입니다.
‘십자가의 도(진리)’가 ‘미련한 것(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찔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와 돌이킴’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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