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3장 1~12절
1. 예언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반복적입니다. 상세합니다. 이 두가지 특징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정확하게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상당히 상세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떻게 무너질 것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들을 제거하실 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어제 읽으셨던 2장 22절 “너희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와 오늘 본문은 계속 연결됩니다. (2장 12절~3장 12절이 한 단락입니다.)
2. 본문 1절의 ‘모든 양식과 물’은 먹거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특히, 어떤 대상을 의지함으로 ‘얻어지는, 얻고있는, 얻으려는 모든 것’입니다. 물질, 명예, 권세, 힘 등 이 땅에서 얻어서 누리려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2~4절에 등장하는 ‘용사, 전사, 재판관, 선지자, 복술자, 장로, 오십부장, 귀인, 모사, 장인, 요술자, 고관 등’이 필요했고,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스스로 그런 자리에 올라가려고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는 핑계?로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의지했던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 이런 높은 자리, 물질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두번째는 그렇게 가치를 둔 것을 얻고, 성취하고,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악순환?으로 유다 백성들도 우리도 ‘높은 자리, 많은 것, 엄청난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무속이 말하는 초월적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 수준으로 평가하고,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오해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죄인에 대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진정한 축복임을 말해도 ‘어떻게 해서 든 보이는 축복’으로 끌고 갑니다. 갖은 핑계와 종교적 논리, 이유를 들어서 포장합니다.
그러니 ‘예루살렘’과 ‘성전’은 최고로 축복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그들의 축복을 증명하는 무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영적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3. 자,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것을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맞습니까? 네, ‘심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이라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회복, 정결’이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재판관이 쓰는 말이지, 죄인들이 함부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사람의 의로움에 기댄 사람은 ‘심판’이라는 표현이 두렵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죄성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그 분의 의로움에 기댄 사람은 ‘회복, 정결’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끌릴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분명 ‘여호와의 날’에 임할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목적은 ‘정결과 회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사야 1장 25~26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인간은 재앙을 자초합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그가 걸어간 삶의 열매를 먹습니다. (9절, 11절)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들을 ‘의인’이라 여겨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붙든 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시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허락해 주십니다. (8절)
이 진리는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은 도덕행위가 아니라, 이 진리 안에서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 겸손, 그 자체이자 시작입니다!
내 속에서 너무 어지러운 것들이 들 끓어오를 때… 네, 또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못 박혀 죽은 그 십자가에 다시 나를 올려 놓으십시오! 십자가를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꽂으십시오! 이 진리, 사랑, 은혜로 인하여 누리는 축복과 승리가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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