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1장 1~20절
1. 오늘부터 ‘이사야’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대예언서 중의 하나인 이사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될 구원을 가장 선명하게 예언한 성경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뭔가 신비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적나라하게는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치듯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은 예수님의 처음 오심(초림)을 향합니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을 향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 생활이 ‘인간 개인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함’을 아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것은 ‘무속신앙’ 수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개인, 가정, 공동체, 국가, 민족 등이 맞이할 미래적 운명의 어떠함 보다 ‘돌이켜 회개할 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예언은 미래가 아니라, 가장 현재적인 선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현재에서 다가올 미래를 말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 앞에 열어놓으신 사는 길, 회복의 길, 생명의 길’을 붙들지 않으면서 ‘미래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언서는 ‘역사적 배경, 사건, 상황’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딛고, 현재의 두 다리로 서서, 미래적 시각으로 예언서를 묵상해야 합니다.
2. 그래서 이사야 1장 1절에 왕의 이름과 자신이 활동한 장소(남유다, 예루살렘)를 분명히 합니다. 대략 B.C 745~680년 경에 이사야서가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아주 복잡합니다. 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 통치 초중반의 고대 근동(이스라엘 주변 지역)의 정세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유리했습니다. 왜냐면, 북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던 아람은 앗수르와 잦은 전투를 치르느라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앗수르 역시 내부의 분열과 메데(이란)의 팽창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바벨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애굽은 과거에 비해 힘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불러온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스스로 높아짐’입니다. 교만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실제 가장 강성한 국가를 이룹니다. 남유다의 웃시야 역시 개혁왕으로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유다(당연히 북이스라엘 포함)’를 향하여 2~20절까지 경고하십니다. 아니, 안타까운 마음을 쏟아 내십니다. 이해가 어려운 내용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자녀를 부르는 부모의 심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 군사적, 영토적 부강함과 확장을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반면, ‘남유다’는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소유’와 ‘왕의 혈통이 다윗과 솔로몬의 적통’임을 내세워 ‘종교적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웃시야’의 종교 개혁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 등이 첨가되니 이처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좋은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남유다’의 영적 상태를 5~6절에 적나라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매를 들어 때리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매 맞을 길, 고통의 길로 걸어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우리를) ‘싸매시고, 기름을 발라 치유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6절)
3. 인간의 어리석음은 ‘자신을 터무니 없이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특별함의 우둔함으로 덮어놓고 눈에 보이는 축복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니 주신다고 착각합니다. 고난은 무조건 영적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자신의 어리석음, 연약함, 죄성에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엎드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알라딘의 요술램프’수준으로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종교적 훈장’으로 이해하여 자기 고난의 계급?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더, 가장 고난 당했다는 이상한 자부심?마저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영적 상태로 예수님을 믿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이 12절의 ‘마당만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영적 포만감’을 위해 종교 생활하는 것을 하나님이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신 것이 11~15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또 부르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8~20절을 통해 간절히 다시 부르십니다. 사는 방법, 생명의 길, 회복의 역사를 약속하십니다.
이사야서를 통해 아파도, 찔려도, 부끄러워도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가 ‘예수님 안에만 있는 생명’을 마음껏 누리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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