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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2022년 목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사무엘상 20장 1~23절



1. ‘사무엘상 20장’은 상당히 깁니다. 그 긴 내용의 중심 주제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약속’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을 찾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사울이 왕의 겉옷을 벗고 예언하였지만, 다윗은 그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도망쳐야 했습니다.

또한 요나단에게 말한 내용을 보면 ‘억울함, 혼란스러움’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다윗은 사울의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 못했기에 저러는지 파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요나단을 찾아갔습니다. 어쩌면 요나단을 찾아간 것도 큰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3절의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는 다윗의 말 속에 그의 막막한 심정이 함축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극한의 위협과 위기를 맞이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적 상태’가 이렇습니다. 삶과 죽음 (육체의 죽음과 생명)은 한 걸음보다 더 가깝습니다.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2. 대부분의 사람은 삶과 죽음이 다른 영역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동전의 앞 뒷면의 차이일 뿐 같은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사람에게 육신의 생명과 육신의 죽음은 하나입니다. 그냥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밖에 있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본질’도 하나입니다. 그냥 ‘죽음’입니다.

3. 저와 여러분은 이런 말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본질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다!”라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말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진짜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깊은 묵상을 통해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없으면, 저것 모자라면, 그걸 이루지 못하면 큰 일 날 것이다. 망할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라며 협박하고, 속이고, 윽박지르는 세상의 공격에서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 과연 그는 목동인 나를 왕 만들어 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했던 사람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처절할 정도로 현실을 살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 어떤 초자연적 기적도 없었던 삶, 우여곡절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삶, 누가보면 계략과 우연이 기막히게 버무려진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같은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나, 범죄한 나, 모자란 나를 품고 계셨구나’라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깨달은 사람입니다.

처음엔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다.”라는 말을 그냥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두려워서 내 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아, 그 삶과 죽음의 간격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채우고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감싸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4. 그래야 ‘시편 27편’의 다윗의 고백이 ‘노래 가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는 고백이 여호와 하나님을 단순히 육체의 생명에서 나를 건져줄 어떤 초월적 대상(신적 존재)을 띄우는 ‘노랫말’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20장’의 긴 내용을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라는 주제에 갇혀 묵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칫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실한 관계’로 적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실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신실한 척하게 됩니다. 물론, 사람의 관계 속에서 신실함을 져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이익을 따라 얼마든지 신실함을 져버릴 수 있는 나를 인정하고, 이런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안에 계신 신실하신 예수님이 나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내가 죽은 자리에 예수님의 신실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사람 사이의 신실한 약속과 언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호의를 베푼 요나단, 그와 약속(14~15절)을 왕이 된 다윗이 지켰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올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호의로 되갚은 다윗의 사람됨(사무엘하 9장)으로 마무리되면 안 됩니다.

요나단이라는 현실 속의 인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드러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급박한 현실 앞에서 생명 그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너 다윗과 함께 한다’라는 사실이 전달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장은 몰라도, 결국은 ‘생명과 죽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결국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처한 모든 상황을 이기는 진짜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생명’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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