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19장 1~24절
1. 이제 ‘사울’은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다윗에 대한 감정, 적개심 등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사위 삼거나 총애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교묘하게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요나단’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2~7절은 이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돕는 요나단과 그의 말을 듣고 잠시나마 정신을 차린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8~17절은 다윗의 승리에 또 다시 영혼의 찌꺼기가 올라오는 사울의 모습, 위험에 처한 다윗을 돕는 ‘미갈’에 대한 기록입니다.
18~24절은 사울을 피해 도망친 다윗과 다윗을 쫓아 ‘라마나욧’까지 간 사울이 예언(?)하는 기록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결국 드러난 ‘사울의 본성’입니다. 겉으로는 ‘왕의 껍데기’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속사람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결국, ‘왕’이라는 자아실현의 궁극을 이뤄낸 못난 죄인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대속의 은혜가 목적이 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를 왕 만들어줄 최적의 신적 존재’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을 ‘잘 믿는 신앙 생활(?)’이라고 스스로 여겼을 것입니다.
2. 이것은 사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죄악된 본성, 탐욕에 물든 속마음을 매일 매순간 토하지 않고 방치한 내면의 모습은 결국 드러납니다. 사울처럼 다 들킵니다.
물론, 그냥 그렇게 살아도 당분간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여전히 왕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분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내가 휘두르며, 누리고 있는 ‘왕의 껍데기’가 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신하들은 당장 ‘왕의 껍데기’에 고개를 숙인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왕의 껍데기’ 때문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시늉을 하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진짜 자기가 대단한 줄 착각합니다.
십자가 은혜 앞에 굴복되지 않은 나의 본 모습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드러나지 않은 나의 어두운 본성과 교활한 마음은 결국 들통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 앞에 들키려고 읽습니다. 사울의 모습을 통해 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읽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비춰지는 ‘성령의 빛’, 그 빛이 가장 먼저 어둠으로 가려진 제 영혼의 밑바닥에 비춰집니다. 비추어지는 것의 본질은 밝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사라짐이 밝음입니다. 어둠은 빛의 임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임하면 그냥 사라집니다.
3. 하나님은 끝까지 ‘사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대속의 은혜, 회개의 은혜, 돌이키는 은혜, 다시 사는 은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아니, 이 은혜는 단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착각하는 것은 ‘왕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영혼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을 영혼으로 택하신 것을 후회하신 것이 아니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사무엘상 15장11, 23, 26절).
물론, 이 후회도 인간의 개념에서 ‘후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마음 나타낸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질투하시는 하나님(출34:14), 후회하시는 하나님(삼상 15:11), 여호와의 손(사62:3), 여호와의 얼굴(민6:25) 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모습을 인간의 형상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왕을 세워 달라고 해서 세워준 하나님’께서 그 첫번째 왕으로 ‘사울’을 세우신 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표현입니다. 결국 왕의 자리를 통해 범죄한 인간에 불과한 사울이 걸어간 길, 그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 여전히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4.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마음, ‘사울’에게 “왕의 모습이 아니라, 긍휼을 구하는 나의 자녀로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다시 드러나는 것이 ‘라마 나욧’입니다.
그곳에서 사울이 무엇을 했다고 기록합니까? 네, “예언(豫言, Prophecy) ”입니다. 우리는 18~24절을 담담하게 읽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언’이 무엇인지 다시 점검하며 읽어야 합니다.
‘예언’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오염(?)된 성질을 정화하고 읽어야 합니다. ‘예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 생각 속에 떠오르는 찌꺼기(?)를 걷어내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예언’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 어떤 개인 혹은 인류에게 닥칠 미래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고, 종교와 무속 따위에서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은 하나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죄인에 대한 구원, 대속의 은혜를 통한 죄인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더 간결하게는 ‘예언=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이 미래적인 이유는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이 미래적인 이유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질투와 분노에 불타 ‘다윗’을 죽이러 ‘라마 나욧’까지 쫓아간 ‘사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대속의 은혜 앞에 엎드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자기 인생의 궁극의 목적이었던 ‘왕의 껍데기, 그 왕의 옷’을 벗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24절의 벗은 몸은 ‘알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껍데기를 벗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은혜의 음성에 반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이 저와 여러분의 예언이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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