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18장 13~24절
1. 잠언 17장, 18장에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으신 18장 후반부는 ‘말을 하는 것,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명합니다.
잠언에 기록된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생명과 구원의 은혜로 회복된 사람의 말,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중요성도 강조합니다.
‘말’은 육체 기관(발성기관)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소리의 파장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14절)
2. 무엇보다 말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속사람의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고상한 언어와 억양을 사용한다고 가려지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구사한다고 숨길 수 없습니다. 논리 정연함과 웅변으로 영적 상태마저 덮을 수는 없습니다. 언어적 수단을 통해 인간 본성을 일시적으로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영적 상태는 또다시 말로 드러납니다.
(요즘은 덜합니다만, 과거 특정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계급장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 언어를 잘하면 모든 것에서 뛰어나다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인격까지 훌륭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것에 머물러 있다면…)
3. 사람의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글과 말이라는 수단으로 인간의 영혼과 내면에 새겨지는 것들입니다.
14, 20, 21절을 함께 놓고 읽어보십시오. 그 의미가 더 다가올 것입니다. 내가 뱉은 말, 내가 쏟아낸 말이 어떠했는지, 어떠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되짚어 보기 싫은 마음을 십자가 앞에 꽁꽁 묶고 돌아봐야 합니다.
사실, 더 엄격하게는 음파로 드러나지 않은 ‘소리 없는 언어’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머리와 마음 속에서 돌아가는 생각의 언어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럴 때가 많습니다. 띄우는 언어, 비꼬는 언어, 부추기는 언어 등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것이 재치, 유머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내면의 생각과 드러나는 말을 다르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속이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남을 속이는 것보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4. 언어에 관한 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왜냐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언어는 내면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가 드러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회복되었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마음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본성대로, 내 성격대로 말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진다면…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면…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면… 정말 이상한 겁니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합니다. 살얼음판 걷듯이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입으로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자랑은 아닙니다.
(가끔 이런 분들을 봤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다.’라는 핑계로 쏟아내는 분들을 봤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답은 아끼겠습니다.)
혹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조심하는 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내가 먼저 말하기 보다 상대방의 말을 하염없이 듣는 것, 마음을 열어 심령에 담아내 듯 그 말을 들어준 적이 있으십니까? (제 3자를 도마 위에 올리는 대화 말고…)
5. 나는 누군가의 사연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주지 않는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라는 우리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심령의 상태, 영적 흐름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이 말씀 앞에 저도 모르게 ‘그래도 난 그럭저럭 잘 들어주는 편 아닌가? 설교와 묵상 글을 통해 복음으로 사람 살리는 말을 하는 것 아닌가? 이정도 말을 가려서 하기도 힘들지 않나?’라며 으쓱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제 안에 깊이 박힌 죄성과 상처를 가리려는 음흉한 본성이었습니다.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교묘한 자아의 목소리(말)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성경을 읽으며 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본성, 죄성, 상처 등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아프고, 부끄럽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저를 엎드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19:14)
내 안에서 나의 기도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언어, 입술의 언어를 십자가에 걸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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