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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시편 86편 1~17절


1. 시편 86편의 표제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아삽, 고라 자손’의 시편을 중심으로 편집된 ‘시편 제 3권(시편 73~89편)’ 속에 ‘다윗’이 기록한 시편이 포함됩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을 여기에 배치한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참고해도 그냥 ‘고라 자손’의 시편을 모아 놓은 곳에 ‘다윗 시편’이 있다 정도로 서술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유를 찾으라면, ‘사무엘상’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다윗’을 기억하게 하는 우연속에 숨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의미를 두지는 마십시오.)

본문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그리며 읽었습니다. 첫 시작부터 마음에 질문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가난하지 않은데? 다윗은 궁핍하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무엘상’의 시점에서는 ‘다윗’이 아직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닌 도망자였지만, 가난과 궁핍에 시달린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2.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은 왜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라고 말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난, 궁핍’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를 입은 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입니다.

특히, 2절을 조심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것은 “나 신앙 좋습니다.”라는 식의 말이 아닙니다.

“경건하오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Haciyd’는 ‘은혜(긍휼, 자비, 인자)’를 의미하는 ‘Hessed’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나는 경건하오니”를 원어적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건(敬虔, piety, devotion, reverence)’의 참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 생활’이라는 것은 ‘뭔가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 십자가 은혜의 영적 무게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3. 이런 마음으로 ‘시편 86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다윗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네, 은혜 앞에 감사하지만, 은혜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 이유(2절)!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그 분을 바라보며 자신을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는 이유(3~7절)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응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발견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함!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는 ‘기적의 승리’를 주신 힘센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에게서 죄값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죽을 대상(제물)’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런 나 대신 죽는 존재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위대하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주의 도(道 way),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절)


4. 십자가 은혜로 건짐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누가 이러니 저리니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이런 내 모습이 보여서 그렇습니다. 십자가 놓치면 ‘스올(지옥)’보다 더 깊은 영혼의 밑바닥을 허우적거릴 것을 알기에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고 또 구하게 됩니다. (13절)

14절의 ‘교만하고, 포악한 사람’은 성격이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 잘하는(잘한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나를 공격하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는 ‘내 앞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자신의 결백과 열심, 의로움 따위를 포장하기 위해 종교 구호화 된 ‘Coram Deo(하나님 앞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벌벌 떨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르나 감히 믿음으로 15절 이하의 고백, “그러나…”라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납작 엎드린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 이런 은혜를 안 다면,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할 시간도 모자랍니다. 남을 안타까워하기 전에 안타까운 내 모습부터 보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경건해야 합니다. 네, 두려워 떨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 잘 되는 것 같다고, 조금 축복받은 것 같다고, 조금 쓰임 받는 것 같다고 고개를 드는 것처럼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건짐 받은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릴 줄 압니다. 엎드린 자가 살아야 할 모습도 압니다. 모르면 가짜입니다. 알고도 그대로 살면 위선입니다. 적어도 부끄러운 줄 알면서 삽니다.

혼자 또 가슴 치며 기도합니다. ‘잘하지는 못해도 위선자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종교 껍데기 뒤집어쓴 경박한 자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엎드립니다. (5절)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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