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31장 10~31절
1. 잠언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살펴보았던 시간이 마무리 됩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제는 엇비슷하게 지키는 말씀을 가지고 나의 의로움으로 삼지 않겠다. 지키지 못하는 말씀을 얼버무리듯 피해가지 않겠다. 나에게 그 말씀을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말씀을 이루어 가실 줄 믿고 결단하는 삶을 살겠다.”
모자라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잠언을 통해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알량한 자기 의로움과 도덕적 우월감의 무서움 보았습니다. 말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저의 간사함을 다시 십자가에 붙들어 매게 되었습니다.
2. 잠언의 마지막이 ‘르무엘(솔로몬) 왕의 어머니(밧세바)’의 권면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잠언을 정리한 편집자들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아들(솔로몬)의 삶을 바라보는 어머니(밧세바)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말이나, 글의 권면 이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깊은 회한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한 후회에 휩싸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권면은 ‘나 같은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야 하는데, 어찌 저런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느냐.’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녀가 다윗의 아내가 되고, 솔로몬을 낳은 배경은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밧세바’에게 ‘대속의 은혜’는 처절하리만큼 실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과 다윗의 범죄함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여디디아(솔로몬 혹은 르무엘)’이라는 새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육체(자궁)와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3. 오늘 본문의 ‘현숙한 여인’은 분명 우리(남녀 모두)가 닮아야 할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의 모습이 맞습니다. 가정을 세우고, 돌보기 위해 부지런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궁극의 현숙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21~22절을 통해 ‘홍포, 붉은 자색옷’을 입고 우리의 모든 죄악과 수치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며, 말씀을 한절 한절 마음과 전인격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어설프게 행한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원래 그런 자기 본성과 성품으로 몇 가지 비슷하게 행한 도덕적 결과물에 취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도 안 됩니다. 심지어 복음적 해석, 영적해석이라면서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 어쩌고 저쩌고’하는 것도 안 됩니다.
4. 죽을 만큼 지키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행한 결과물이 나타나면 숨으십시오. 모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만, 어떤 칭찬이 들리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산으로 가십시오.
어쩌면, 진짜 성령의 열매는 지금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행한 그 사람이 이 땅을 떠난 뒤에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것조차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우리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라는 사도행전의 역사도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계시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너무 까다롭게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까다롭게 말해도 인간의 자기 의로움은 죽은 것 같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십자가에 못 박힘을 택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너무 하기 싫지만, 해야 합니다.
‘죽어도 하기 싫은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유일한 이유가 이것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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