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85편 1~13절
1. 계속해서 ‘고라의 자손’이 기록한 시편이 이어집니다. 시편 85편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시 부르심과 회복시켜 주심의 은혜를 찬양한 것입니다.
1절의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라는 기록을 통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이 끝날 즈음이나,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정착한 이후(B.C 5세기 경)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고 당장 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꽃 길’이 펼쳐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물 골짜기(시84:6)’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갈 가능성, 죄성, 본성’이 여전했습니다. 8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2. 우리 다시 새길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것이 무엇입니까? 똑똑하지 않은 것, 지능(?)이 낮은 것입니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공부를 못하고, 상황 판단이 느린 것입니까?
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어리석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것, 하나님께서 대속의 은혜를 통해 베푸신 화평(하나님과의 평화)을 떠난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들어서 압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어리석음’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의 똑똑함이 하나님에게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해 지려고 ‘잠언’을 읽습니다. 특히, 자녀에게 잠언을 강요(?)하다시피 읽도록 합니다. 성경을 암송시킵니다. 기왕이면 영어가 더 좋습니다.
3. 자꾸만 저런 생각이 섞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내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내 존재를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과 함께 ‘에베소서 2장 1~7절’을 다시 펴서 묵상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내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나를 덮어주신 십자가 보혈, 그 은혜를 영혼에 새깁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저마다의 ‘루틴(routine)’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커피 한 잔’입니다. 육체를 위한 각자의 ‘루틴(routine)’, 그런데, 영혼을 위해 어떤 ‘영적 루틴(Spiritual routine)’이 있으십니까?
사실, 제 개인적으로 ‘영적 루틴(Spiritual routine)’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라도 제발 잊지 말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침에 눈을 뜨면…십자가 은혜로 덮으시고, 가려주신 은혜를 가장 먼저 묵상합시다. 더 적극적으로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나는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사십니다. 이 영적 진리를 잊고, ‘어리석은 자의 삶’을 살지 않도록 붙잡아주십시오.”라는 기도와 고백이 잠을 자다 깨어나 첫 호흡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아침에 첫 호흡의 감격을 느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되는 사람은 첫 호흡의 감격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주시는 새생명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연결됩니다.)
4. 우리가 아는 것처럼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은 ‘다시 베풀어 주신 은혜, 덮어주고 가려주신 은혜’를 결국 잊어버렸습니다.
‘자격 없으나 선택 받았다’라는 것에서 ‘자격 없으나’를 망각했습니다. ‘선택 받았다’만 남아 버렸습니다.
“우린 달라. 다시 성전을 지은 우리는 뭐가 달라도 달라. 저 사마리아 사람들(‘사람들’이면 다행입니다. ‘것들’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과 우리는 달라!”라는 생각에 지배당했습니다.
2절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를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덮어진 죄악, 가려진 나의 본성… 그걸 알면 뛰쳐나갈 수 없습니다. 가려진 은혜를 발로 차고 내 맘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 성령의 비춰 주심을 착각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이유, ‘주의 장막’이 나를 덮는 이유는 나의 본성과 죄성을 가려주고, 덮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가리고 덮어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직시하며 ‘좌우에 날 선 성령의 검’으로 도려내도록 결단하게 하십니다.
(여기까지 나가지 않았다면, 정말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심각하게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로 허락된 하루를 산다는 믿음이 있다면, ‘십자가 은혜로 덮어지고, 가려진 내 존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주의 덮으시는 손길’보다 ‘유혹과 위험에 반응하는 죄악된 나를 덮으시는 십자가 보혈’을 먼저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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