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1.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거나, ‘예수님의 부활’을 당시 사회적, 종교적 통념 속에서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절)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전파하는 것도, 믿음도 헛것’임을 말합니다. (13~14절)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하나님 역사가 거짓’이라 말합니다. (15~16절)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의 확증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너희는 (우리는)죄인이라고 말합니다. (17절) 예수님을 믿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모든 사람도 또한 우리도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18절)
이것을 서술하면서 사도바울은 ‘부정법, 질문법, 조건법’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읽고, 듣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생각하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스스로 질문하여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맹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의 이성과 사고 체계는 받아들인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2,000년 전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철학, 사상의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도 그 사고의 틀 속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당시 여러 사상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영육이원론’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인 모든 것은 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당시 사람들은 악하다고 규정한 물질적인 것을 멀리하면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더 쫓았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말은 보이는 것은 악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선하다면서 실제 행동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네, 위선(僞善 hypocrisy)입니다. 스스로를 관념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한계와 수명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의 삶은 허상이기에 육체를 가지고 육체의 것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관념의 배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접한 사람들 중에는 영특하고, 영악하게 취할 것만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섞을 것은 섞었습니다. 일명 ‘내가 복음’을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편집한 ‘내가 복음’은 육체의 부활이 있으면 곤란해 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육체로 범한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하는데, 다시 육체로 부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찝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용서함 받았다 하더라도 뭔가 깔끔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육체의 것은 끝나야 하는데, 단절돼야 하는데, ‘육체의 부활’이 있다고 하니 싫은 겁니다.
3.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내가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 자아가 신적인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적어도 내일 읽으실 본문까지 함께 깊이 보셔야 이해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은 ‘각 개인의 부활’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습니다. 즉, 믿는 자의 부활은 각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살아 계신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항상 말씀 드리듯이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 복음’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2:20) 따라서 부활도 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깨달았고, 이 신비가 기뻤습니다. 그래서 15장 전체에 걸쳐 ‘각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설명합니다.
좀 복잡하고,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부활’은 사람의 이성, 판단, 교육, 경험 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질문법과 조건법을 사용해봅니다.)
“진정한 성도는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이제는 ‘내 자아가 아닌, 예수님이 나 대신 사는 삶’을 삽니다. 맞습니까? 여기에 전인격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자, 이것이 믿어지고 동의가 되는 데 저와 여러분의 부활이 ‘내 자아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인으로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이 어떻게 안 믿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의 참 부활과 생명이 있는 사람,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부인(否認), 자기소멸, 예수영접, 예수생명’이 가장 큰 기쁨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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