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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2020년 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1. 오늘 본문은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로 질문을 드립니다. “읽어 보시니, 결론이 교회 내에서 즉, 다른 사람이 있을 때, 방언을 하라는 말입니까?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네,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8~19절이 결론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유익이 있는 방언은 그냥 혼자 있을 때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의 근간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13장에 기록한 사랑, 14장 1절의 시작에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2.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5절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특히, 4~5절을 보시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 유익이 있는 방언’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이 더 우월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방언과 예언’을 절묘하게 섞어서 ‘방언으로 예언’하는 것이 ‘신령한 것’의 정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언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은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 미지의 일, 신비한 일,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을 택함 받은 사람의 입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죄인을 살리시는 대속의 은혜, 그 구원과 회복,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곁가지에 주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이냐 3년이냐, 그 사건이 어느 왕 때 일어나느냐, 누가 죽느냐 사느냐, 그곳이 점령 당하느냐 마느냐’ 따위가 예언의 핵심이 아닙니다.

4절의 말씀처럼 ‘예언’이 ‘교회의 덕’이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래적 사건을 말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에 마음이 빼앗기면 우리 스스로 십자가 복음을 점괘 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럼, 방언은 무엇입니까?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언어,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신비한 것이라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도록 ‘하늘의 언어’ 또는 ‘타국가, 민족의 언어’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절과 4절을 잘 봐야 합니다. ‘방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덕,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진정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죄악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용서받는 것입니다.’


3.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방언은 절제 가운데에서 통제가 가능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하지 않습니다. 특히, 방언으로 예언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한 소절 방언으로 말하고, 그걸 통역하는 듯 말하지 않습니다.

2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어쩌면 ‘방언 기도의 무서움?’입니다.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즉, 나의 이성, 생각과 상관없이 내 속의 것들을 다 토해냅니다. 성령께서 내 속사람의 상태(죄악, 본성, 범죄 등)를 그대로 하나님께 다 쏟아 놓게 하십니다.

(만약, 정말,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아서 그걸 다 통변한다면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내 속사람, 본성과 죄성을 다 듣게 된다면 상상만해도 아찔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 혀의 움직임을 통한 어떤 소리 따위는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도 신비하다며 참 오래도록 ‘종교행위의 기도’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도 합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의 갖가지 종교들도 이런 류의 ‘신비적 행위’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런 것들이 고린도교회에 흘러 들어와 ‘방언,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십자가 복음’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 앞에 내 속사람의 상태를 쏟아 놓고, 십자가에서 씻음 받고, 용서받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깊은 영적 관계 속에서 나의 속사람을 낱낱이 쏟아 놓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 하면 됩니다. 조용히 하면 됩니다.

그렇게 쏟아 놓은 나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고, 용서 받았음을 함께 나누고, 고백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방언 혹은 예언을 하고 말고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왜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걸러진 ‘방언과 예언’을 말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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