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1. 오늘 본문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입니다.
8~10절에는 ‘성령의 은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것 외에도 더 다양합니다. 외적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것도 있고, 감춰진 듯 내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기록한 오늘 본문도 사람 생각의 익숙함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읽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까? 무엇을 받으면 나에게 더 유익이 될까? 저 사람과 내가 받은 은사는 뭐가 다를까? (이런 생각은 남과 비교하는 ‘영적 질투’일 수 있습니다.) 등”과 같은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2. 본문 1절의 “신령한 것” 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음,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떠오르는 그것… ‘신령함, 거룩함, 신비스러움, 신적인 기운,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의 교감, 미래를 족집게처럼 맞춤 등’이 떠오르십니까?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신령한 것’을 위에 말한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2절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저런 류의 “신령한 것”을 쫓아다니고, 저런 식으로 “신령한 것”을 이해하고, 8~10절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를 ‘신적 존재에게서 부여받은 초월적 에너지’ 정도로 이해한다면 진짜 비극입니다.
그러니, 어느 교파처럼 ‘방언을 말함이 구원의 증거’라는 식으로 우기게 됩니다. 그게 심해지면 결국 ‘이단, 사이비’에 빠지게 됩니다.
“신령한 것”으로 번역된 ’pneumatikos’는 ‘성령’으로 번역하는 ‘pneuma’의 형용사형이라 보시면 됩니다. 영어번역은 ‘spiritual gift 혹은 the gifts of the Spirit’이라고 번역합니다.
네, 말 그대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첫번째 ‘무조건 주시는 선물’ 또는 ‘제일 먼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로 3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 나의 생명, 나의 전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인격, 전존재’가 예수님에게 굴복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된 삶을 사는 것까지 연결됩니다.
두번째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선물’이라고 할까요. ‘주인 되신 예수님의 주권에 따라 그 성격과 종류 등이 달라지는 선물’입니다. 굳이 말하면 8~10절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람이 생각하는 따위의 ‘우열’은 없습니다.
3. ‘더 좋고 덜 좋고’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4~6절 그리고 9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쩌면, 주목해야 하는 줄 아는데 주목하기 싫은지도 모릅니다.)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 즉 ‘드러난, 감당하는, 이루어진 것들의 주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은사, 직분, 사역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주시고, 허락하시고, 행하시는 분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제발 “누가 누가 뭘 받았네, 어떤 일을 감당하네, 무엇을 주의 이름으로 이뤘네” 따위로 ‘도토리 키 재기’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8~10절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 네, 다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일하심을 강조합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도 지금 우리도 ‘본성’은 같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 우월함’에 취하려 합니다. 은사, 축복만 받으면 자기도 모르는 우쭐댐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어떻게 든 ‘뭔가 내가 가진 것이 좀 더 낫길 바랍니다.’ 드러나지 않는 은사도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가진 것은 기왕이면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씀드릴까요? 위의 저런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진짜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 성령의 귀한 은사를 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주님 발 앞에,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자기 우월감’을 내려놓음을 통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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