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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2020년 화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4~11장 1절


1. 오늘 본문을 끝으로 8장에서 시작한 우상 제물 문제를 마무리 합니다. 고린도전서 8~10장에 기록된 ‘우상 제물 문제’는 그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부딪히는 실생활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유통되는 물건들은 ‘우상 신전’에 바쳐진 이후에 시장에서 판매되었습니다. 따라서 ‘우상에게 바쳐진 물건’을 사고 팔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논란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어느 회사는 사탄을 숭배하니 사면 안 된다. 어떤 제품을 구입하면 특정종교로 돈이 흘러 들어간다. 마지막 때 짐승의 표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 걸리지 않으려면 문명을 등지고, 산 속에서 수렵 채집 생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든 도구도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신학적 용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입니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것’,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하지 않은 것’을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23~24절을 마음에 새기며 행동해야 합니다.


2. 우리가 8~10장을 읽다 보면 ‘사도 바울’이 아주 길고 복잡하게 ‘우상 제물(신전을 통해 유통되는 제품)’의 문제에 관해 기록한 것 같지만,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상에 바쳐졌던 물품(음식)’과 ‘우상 숭배 자체’를 구분했습니다. 14절에서 ‘우상 숭배는 피하라’고 말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것(우상에 바쳐진 제물)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우상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이 ‘우상 숭배’와 연결되는 것은 결국 ‘마음, 중심, 신앙 양심’의 문제라는 것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27~28절)

27~28절에서 누군가의 초청을 받았을 때 참석하되, 아무 말없이 차려진 음식을 먹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하면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상에 바쳐진 것임을 알고도 먹는 것을 봤을 때, 초대한 사람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인데,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일부러 그리스도인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선수치듯 ‘우상에 바쳐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양심의 문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상숭배의 끝은 ‘자기 숭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자기 유익, 자기 욕심, 자기 충족’에 근거한 행동의 결과라면 ‘자기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도 ‘자기 의로움, 자기 종교심, 자기 신념’에 근거한 행동의 결과라면 그 역시 ‘자기 우상 숭배’입니다.


3. 23~24절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23절은 오히려 더 까다롭다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24절은 문자적 ‘이타적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희생, 섬김, 헌신, 봉사’조차 자기 유익을 구함’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중심에서 사건을 해석하지 말고, 상대방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조건을 신적 시각에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로 죽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각에서 생각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종교적 노력, 업적, 열심, 행위 등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대속의 은혜’를 붙들도록 하셨습니다. 이것 조차도 못 알아 듣는 인간, 이것 조차도 행할 능력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자기 유익’에 끌릴 수 밖에 없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생각, 욕심)’을 구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의 유익(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속의 은혜의 완성이자, 영적 자기 절제 결정체’인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33절)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예수님의 종교적 행위를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행동이 ‘자아 숭배’를 위한 것들이었는지가 분별됩니다. 이런 진정한 영적 분별이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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