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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2022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룻기 2장 1~13절


1. 룻기를 읽으면 따스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밑바닥의 삶, 그 삶의 끝에서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의 시작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장 16절)에서 출발했습니다.

‘룻’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그들의 배타성을 모를 리 없습니다. 게다가 ‘룻’과 ‘나오미’는 남편이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삶’, ‘0(zero)의 삶’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판단은 두 여인의 삶을 ‘마이너스(minus)의 인생’으로 만들기 딱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절망했습니다.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렸습니다. ‘기쁨’이라는 뜻의 자신의 이름(나오미)마저 저주(?)했습니다. ‘쓰다’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며 자신의 삶을 원망(?)했습니다(1장 19~21절).


2.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녀의 원망 섞인 탄식과 절규에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나오미와 룻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두 여인을 향해 어떤 평가를 내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묵묵히 두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나오미’가 떠나온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 여인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삭 줍기’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을 잘 읽어보면, 밭의 소유주의 허락(“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 있어야 이삭을 주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이삭을 줍겠다는 허락만 받았습니다(2절 “내 딸아 갈지어다”). 그리고 무작정 ‘베는 자’ 즉, 추수하는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거기가 어딘 줄도 모르고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 밭이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의 친족 보아스’의 소유였습니다. (3절)

‘우연’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연’은 오늘의 삶이 연결될 때 일어납니다. 오늘 허락된 일, 해야 할 일 속에 하나님의 손대시는 역사가 만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우연’입니다.


3. ‘나오미’와 ‘룻’은 버텼습니다. 처절한 삶의 끝자락에서 견뎠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 질기도록 견뎌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을 경험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가누가 더 처절한 인생인가?”를 경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다 깨져 나갈 정도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영혼의 절박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를 여쭙는 것입니다.

‘이삭 줍기’는 얼핏 떠오른 유명 화가(밀레, Millet)의 그림 수준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물론, 밀레는 그의 작품속에 깊은 뜻을 담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만 붙들고 ‘베들레헴’으로 온 ‘룻’에게 펼쳐진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거친 들판에서 허리 숙여 이삭 줍는 인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밭’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을 살기 위해 허리 숙여 이삭을 주웠습니다.

4.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4절의 대화를 보면 먼저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베는 자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처음 보는 ‘룻’을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하는 한 사람 한 사람, 심지어 이삭을 줍는 사람들 하나하나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11절을 보면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 그들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귀합니다. ‘보아스’는 그 이야기를 넘겨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나오미’와 ‘룻’을 도울 기회가 주어지길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알아본 것입니다.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낯 선 여인’을 주목하여 보았고, ‘저 낯 선 여인이 룻이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다시 ‘사마리아 여인’을 생각해봅니다.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신 예수님과 그녀의 대화를 되짚어 봅니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야곱의 우물’에서 쉬신 예수님과 지친 인생의 무거움을 가졌으나, 오늘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야곱의 우물’에 온 여인과의 만남은 닮았습니다. ‘보아스’와 ‘룻’과의 만남과 너무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허리가 빠질 듯 주워도 겨우 한 끼 먹을 양식을 손에 쥔 ‘룻’과 ‘나오미’의 배고픔을 아십니다. 한 동이 물을 채우면 겨우 하루 마실 물 밖에는 긷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리라. 내가 너의 생명수가 되리라. 진정한 생명의 양식, 하늘의 떡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 6장 35절)고 말씀하십니다.

‘룻, 나오미, 우물가의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푹 젖어 들어, 거친 인생 가운데 누리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풍성함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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