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12장 16~25절
1.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17절을 통해 이 본문이 ‘사무엘의 고별설교’가 아니라, 사람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빼앗지 않으시고, 어떤 압제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부당한 것도 받지 않으신 하나님(3절)!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아름다우시다는 표현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에서 눈에 보이는 각종 우상과 애굽의 화려함에 속아 살았던 그들, 그렇게 노예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의 타락한 육체와 전인격으로 누릴 것들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땅의 것들도 주시는 분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주시지 않을 뿐입니다. 나의 종교행위 혹은 의로움, 잘남 따위는 하나님께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인간 왕은 그게 가능합니다. 눈에 보입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사람들의 환호가 덧입혀지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람의 의견이 통합니다. 여론과 민심이라는 것으로 왕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사울을 비롯한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눈치를 보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모든 세상의 위정자들은 다 그렇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인간 왕이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다스림에 있어서 독재 혹은 고집(?)을 부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왕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백성들이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왕 혹은 지도자(목회자 포함)로 세움 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어떤 인간에게 주어져서 그 인간이 하나님 대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나(인간 왕)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백성들)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 왕 혹은 지도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감히, 나의 권위에 도전을? 하나님이 세우신 나의 권위에?”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과 초대 왕 사울이 보는 앞에서 간곡히 부탁하고 계십니다. 제발 정신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에 “밀 베는 때”는 건기를 말합니다. 이 때 ‘우레와 비’를 내리심으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싫어 버린 그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잊지 말라고 초자연적 현상과 함께 분명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만약, 역대 이스라엘 왕 중의 한 명이었다면 이 장면을 영혼에 새겼을 것입니다. 마음의 액자에 ‘사무엘상 12장’이라고 써서 걸어 두었을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훌륭하게 쓰임 받는 왕이 되겠다.”라는 애매한 비전, 그 속에 숨어있는 자아실현적 꿈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말자. 이 왕의 제도는 허락일 뿐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달라는 죄악을 범했다. 왕의 껍질을 썼을 뿐 오늘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또 다시 백성들을 범죄하게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라는 두려움과 떨림을 품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무거움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다. ‘왕’이라는 힘과 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을 것처럼 기도하고, 자기를 십자가 앞에서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4. 내게 허락된 것들에 대한 엄중함을 깨닫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20~25절을 기억합니다. 이런 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십자가 앞에 엎드린 자의 삶, 아니 죽은 자의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세상의 높아짐,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 명예로움에 취하여 휘청거리는 제 자신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의 한숨, 그 탄식보다 ‘성령의 탄식’을 붙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절)는 이 말씀을 붙듭니다.
제가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23절이 사무엘의 기도 능력(?)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다윗 같은 대단한(?) 인간 왕의 삶’을 추종(?)하기보다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진정한 나의 왕이신 하나님의 메시지(사무엘상 12장)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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