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2020년 화요일 묵상
- Hyung Yun
- 2020년 5월 26일
- 2분 분량
본문: 시편 23편 1~6절
1. 시편 23편은 시편 1편과 함께 시편 중에서 가장 친숙할 것입니다. 과연 ‘시편의 진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목자의 시’로서 1~4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5~6절에서는 나에게 영적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23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경험한 ‘유다 광야 생활’에 대한 기억만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 경험이었던 ‘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배경으로 합니다. 나아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시편 23편을 읽은 유다 백성들은 ‘포로기’의 기억이 겹쳐지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기억’을 반영한 노래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변함없이 묵상, 암송합니다. 기독교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붙여서 ‘찬양곡’으로 재탄생 시키고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 선포한 1절의 이미지는 이곳 말고도 구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이스라엘) 전통에서 오래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8장 15절, “나의 출생으로 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기르신”과 “목자”의 히브리어 어원은 ‘raah’로 동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맞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종을 강요하고, 저주와 두려움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비인격적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어리석은 나, 범죄한 나, 가만히 두면 스스로 멸망 길을 걸어가는 존재인 나를 인자하심과 선함으로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절의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꿈꾸는 그런 ‘좋은 것이 좋은 환경, 상태, 상황’을 말하지 않습니다. 3절의 “영혼의 소생”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특히 3절은 4절을 향한 ‘다리’입니다.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연결됩니다.
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말합니다. ‘해(害,bad, evil 등)’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하시는 목자이신 여호와’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5~6절의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 풍요, 생명, 동행’으로 이어집니다. 5~6절은 ‘성막(성전)에서 드리는 대속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과 함께 사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5절은 번제단과 물두멍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린 후 성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이미지입니다. “상(table), 기름”은 성소 안에 ‘진설병이 올려진 떡상’과 ‘촛대를 밝히는 기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저는 시편 23편을 다시 읽으며 제 자신의 관점이 아닌,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따르리니”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는 구원과 축복을 향한 사람의 간절함보다 하나님의 집요함(?)이 더 녹아 있습니다.
“따르리니”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다프(radaph)’는 ‘쫓아가다, 뒤쫓다, 추격하다.’입니다. 부드럽게 번역했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맞을까요? 목자의 인자함, 선함 속에 사냥꾼의 집요함, 끈질김이 더해져 있습니다. 은밀하지만 집요하게 우리를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감춰진 강열함이 녹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붙들어야 할 것은 ‘죄인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너그러움! 죽은 영혼을 살리시려는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끈질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심!’ 뿐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우리를 쫓아와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될 줄 확신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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