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6장 1~7장 2절
1. 오늘 본문은 블레셋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말씀을 가만히 보다가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오직 은혜’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붙들고 싶다고 붙들어지는 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궤’가 ‘일곱 달’을 블레셋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체류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엄청난 일(5장)을 겪었지만,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낼 때 ‘블레셋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잔머리, 잔꾀, 저울질, 무속적 세계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2~9절에 잘 드러납니다.
특히, 9절이 그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우연이길 바라는 인간의 얄팍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2.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이 비단 ‘블레셋 사람들’에게만 있을까요? ‘여호와의 궤’를 대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태도와 4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같은 것입니다. 겉모양만 다를 뿐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영적 자세는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머리 속이 있는 생각, ‘여호와의 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여호와의 궤’를 종교 상징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당이 써주는 부적을 곳곳에 붙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궤’가 저주와 재앙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블레셋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껍질만 다를 뿐 속의 상태는 동일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앙과 저주가 없었다면,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전리품으로 여기면서 ‘여호와’라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神, god)이 주는 혜택(?)도 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신발장에 하나 더 놓인 신발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와 재앙이 임합니다.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싶지만, 그 찝찝함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해결책이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7~9절에 기록된 것처럼 얕은 수를 씁니다.
3. 우리라고 다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라고 다를까요? 물론, 절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속적 신앙관으로 종교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난 십자가를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신앙의 가치관이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고, 교묘합니다.
땅의 것들이 좀 잘되면, 축복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꽉 채웁니다. 지금 삶의 방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옳다고 여깁니다.
땅의 것들이 잘 안 되기 시작하면, 찝찝함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이 손대는 것 같다는 불안함이 내면에서 스멀거립니다. 어떤 종교행위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밀려옵니다.
보십시오. 결국 판단 기준은 ‘내가 원하는 것들, 내 눈에 보이는 것들, 내가 누리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땅의 것들을 가지고 ‘내가 십자가 복음에 붙들려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려 합니다.
4. ‘여호와의 궤’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궤’는 저주와 재앙의 원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면 낭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종교 악세서리 취급하면 안 됩니다. 성령 하나님을 단순하게 내 인생의 안내자 혹은 수호자 정도로 여기면 안 됩니다.
암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벳세메스’로 향하는 ‘여호와의 궤’를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버린 이스라엘, 나를 이용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향해 다시 되돌아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녹아 있습니다.
(숙제를 하나 드릴까 합니다. 12~14절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이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지면의 한계와 저의 부족한 글쓰기 실력 때문에 다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수요예배 때 조금 더 살펴볼까 합니다.)
‘여호와의 궤’는 두려움과 능력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먼저 찾아오셔서 아무것도 모르는 죄인과 언약을 세우시고, 함께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저주와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과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이끌린 순전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어떠함으로는 이런 ‘순수함, 순전함’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택한 것이 기쁨이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이런 나를 향해 다시 찾아오시는 ‘여호와의 궤’를 기쁨으로 품습니다.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그 분이 내 속을 다 들여다 보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사는 길임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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