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14장 43~52절
1. 예수님이 잡히십니다. 43~46절에 기록된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치밀하고,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예수님을 체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장(칼과 몽둥이)을 한 성전 경비병(대제사장이 파송한 무리)들이 동원됩니다. 예행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군호(암구호)까지 정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범죄자를 다루듯 포박했습니다. (43~46절) 이때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베어 버립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입니다. (요18:10)
2. 정말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다.”(48~49절)며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심령에 호소하신 것입니다. “내가 강도, 범죄자가 아닌 것 알지 않느냐! 내가 성전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쳤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라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아픈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3. 그렇게 마가복음의 기록은 50~52절로 이어집니다. ‘도망간 제자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한 청년’에 대해 기록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마가를 통해 왜 이렇게 기록하셨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 잡으러 온 그들, 도망친 제자들, 도망간 한 청년’ 모두 똑 같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굳이 ‘경중’을 따질 수 있습니다. 누가 더 악하고, 누가 덜 악한 지 따져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람 기준, 사람 생각, 사람 판단, 사람의 의로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십자가 복음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기준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4. 혹시 이런 사람 있습니까? 적어도 난 ‘가룟 유다’는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람이 제일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제일 잘 알았습니다. 정확히 알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향한 존경의 표시를 가지고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예수님을 이용하고, 팔아먹는 사람은 ‘제일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자신이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제 살펴보신 것처럼 ‘겟세마네의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에 내 자아를 쳐 복종시키기 위해 죽을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애꿎은 소나무 뿌리만 뽑습니다. 배만 쫄쫄 굶으며 징징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제목이라며 요구 사항만 잔뜩 적은 청구서를 들이 밀게 됩니다.
아주 지능적인 경우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는 본격적인 기도를 위한 미사여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요렇게 되겠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 후 ‘잡히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5. 많은 사람들이 51~52절의 ‘한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정확한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대체로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이 사실을 기록했을까요?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 울리는 성령의 음성은 “다, 똑같다. 잡아오라고 보낸 그들, 잡으러 온 그들, 배신한 가룟 유다, 도망친 제자, 한 청년… 모두다 똑같다. 그저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필요한, 나 예수가 필요한 죄인일 뿐이다. 나는 이 모두를 살리기 위해 붙잡혔고, 맞았고,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우리를 다시 생명, 소망, 능력의 십자가 앞으로 이끄는 성령의 음성을 붙드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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