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4월 3일 2020년 금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마가복음 14장 1~11절

1. 오는 주간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진정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우리 심령에 새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13장과 14장 사이, 1절의 “이틀이 지나면”이라는 기록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코 앞에 닥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수미쌍관법(inclusion)’, 일명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을 사용했습니다. A-B-A’구조입니다. A(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B(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은 여인과 책망하는 어떤 사람들)-A’(배신하는 가룟 유다와 돈을 주는 대제사장들)입니다. 제한적인 글과 지면이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통해 ‘중간에 위치한 사건(향유를 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장례)’이 부각됩니다. 물론, 여전히 ‘십자가 생명’이 아닌, ‘사람 생각, 사람 욕심, 사람 이권’에 사로잡힌 그들도 부각됩니다.

사람의 죄성과 한계를 를 벗어나기 위해 ‘십자가 생명’을 죽도록 붙들지 않으면, 누구도 예외없이 1~2절의 ‘그들’, 4~5절의 ‘그들’, 10~11절의 ‘그들’처럼 행동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렇게 ‘종교생활’합니다.

2. 본문 3~9절을 보실 때 확인해야 할 교차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8절입니다. 거기에는 ‘나사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향유를 부은 여인’을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와 ‘한 여인’을 다른 사람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은 약간 혼동될 뿐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베다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심지어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나사로’도 있고, ‘향유를 부은 마리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 향유, 300데나리온’보다 ‘예수님의 장례(십자가)’를 강조하기 위해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 여인이 깨뜨린 ‘향유’의 가격은 엄청난 것입니다. ‘300 데나리온’,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 ‘1 데나리온’을 어떤 기준에서 계산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집니다. 대략, 평균적인 근로자 1년 연봉에 해당됩니다.

4절을 보시면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그 곳에 모인 모두가 화를 내며 말했고, ‘가룟 유다’가 대표격으로 여인을 책망한 것입니다. 네,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우린 또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거기(베다니 나병환자 집) 모인 사람들, 예수님을 쫓아다닌 목적이 뭡니까? 왜 그토록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영한 것입니까? 모든 것을 버렸다며 자랑하듯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왜 따라다닌 겁니까? 진짜 속마음이 뭡니까? 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

제발, 머리에 딱 떠오르는 대답을 지우십시오. 종교생활 오래한 사람의 반사적인 반응을 멈춰야 합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이 하는 그 말을 하려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것이 맞습니다.

4~5절의 반응과 대답은 ‘유대교 종교인’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율법(신10:17~19)에도 그렇게 하도록 명했습니다. 모든 고등종교, 심지어 무속에도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아름다운? 종교 윤리, 도덕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존경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종교사상, 철학’을 설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4. 선행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7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는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이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행하기 전… 가장 먼저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라는 말입니다. 행함에 있어서 ‘자기 의로움’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자기 드러냄’을 깨끗이 지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 속에 있는 ‘자기 의로움, 자기 드러냄’을 부추기고, 자극하여 어떤 행동을 하게 한다면 그것은 ‘종교’입니다. 반대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님께서 나 대신 사는 것은 ‘생명’입니다.

5. 참 안타까운 것은 ‘십자가에서 나는 죽고, 나 대신 예수님 사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아니, 오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오해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말씀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9절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짜 의미는 던져버렸습니다. ‘복음 전파’라는 명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사람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성령께서는 마가를 통해 ‘이름’을 가리셨는데도 말입니다. (제발, 요한복음 끌어오지 마십시오.)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데 익숙했던 ‘그들’(1절, 10절)’은 결국 예수님을 이용해 돈을 주고 받았습니다. 유월절이라는 종교 명절도 이용했습니다.

참 조심스러운 고백을 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생활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의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 요소’가 최소화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내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그 생명’을 붙들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십자가에서죽을때, 내안에선명한십자가의복음, 예수님의생명만이드러나는것이진정한기쁨이되시길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16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 2017 My Father's Church of NJ.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