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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2020년 목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마가복음 13장 14~37절

1. 마지막 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종말)’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을 합니다. 기독교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종말’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은 ‘마지막’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종말보다 결국 ‘죽음’을 통한 ‘개인의 종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하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이유, 이 땅에 ‘그리스도(메시야, 구원자)’로 오신 이유는 ‘마지막(죽음, 종말)’에서 우리를 건지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종말’에 대하여 이런저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9장 27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은 ‘거룩한 성전에 가증스럽고, 더러운 것’ 즉 ‘성전이 우상과 잘못된 제사, 예배 방식’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크게 두가지 견해로 갈라집니다. 첫째는 본문의 성전을 ‘유대인들의 성전’ 특히 최근 유대인들이 건축을 준비하고 있다는 ‘제 3성전’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성전’을 ‘현대의 교회’로 봅니다.

첫번째 견해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의 한 축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특정 사건, 인물, 장소 등에 집중하는 이들의 주장은 위험합니다. 다니엘서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사건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이 더렵혀지고, 유대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은 사건(BC167년 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본다면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한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과 연결됩니다.

성경의 예언은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관점’ 즉 시간이나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큰 흐름을 ‘산맥’으로 비교한다면, 지금(현재)는 산맥 중간의 ‘한 산봉우리’입니다. 거기서 돌아보면 ‘지나온 산봉우리(과거의 사건)’가 보입니다. 앞을 보면 ‘최종의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걸어가보면 ‘다른 봉우리’를 넘어야 합니다. 결국 흐르는 역사 속에 ‘마지막 산봉우리(종말)’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에서 ‘다니엘’서는 ‘지나온 산봉우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그 봉우리(막13장)’에서 ‘종말의 산봉우리(계시록)’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역사 속에서 많은 산봉우리’를 지나왔고, 지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사건, 인물 등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단들은 두번째 견해를 악용합니다. 14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를 ‘오늘날의 교회, 정통 교회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섰다’ 라며 사람들을 그릇된 종말론으로 미혹할 때 이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도 각 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형의 교회(조직체로써 교회)와 무형의 교회(각 개인으로의 교회) 모두가 바른 십자가 복음 위에 서서,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내 삶을 뒤덮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삶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2. 15~16절은 너무 특별히?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임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지방의 지붕은 평면으로 사람들이 그곳에서 곡식을 말리는 등 작업장의 형태로 이용했습니다. 또한 밭에 일을 할 때는 겉옷을 벗고 일을 합니다.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사는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마지막 때’가 오면 뒤돌아볼 것 없이 주님을 맞이하는 겁니다. 어디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주님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지막 때(종말)은 “환란의 날”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힘든 시간’이 될 것입니다. (17~19절) 하지만, 그 가운데 ‘은혜’가 있습니다. “그 날들(환란의 날)을 감하여 주십니다.”(20절)

여러분, 이것이 단순히 ‘시간의 길이 혹은 날짜의 경감’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네, 사랑하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환란의 날’마저도 짧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금방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려움의 시간도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그 때가 언제 인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32~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할까요? 왜 자꾸 언제 오시는지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요?

그토록 계산한 어떤 미래에 주님 오실 것을 예비하는 것보다, ‘오늘 밤, 주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 맞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죽음)으로 주님을 만날 것’을 예비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2~34절, 각 절마다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기와 때’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 내게 허락된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어떤 어려움에도 성령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때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우리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스스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두려움없이 ‘마지막 때’를 기쁨, 기대, 감사, 소망, 사랑으로 기다리며 예비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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