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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2020년 화요일 묵상

작성자 사진: Hyung YunHyung Yun

본문: 에스겔 33장 21~33절

1. 오늘 본문 21~22절은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에스겔서에는 21절에 기록된 것처럼 정확한 날짜, 달, 연대 기록이 13회 등장합니다. 이것을 통해 두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분명이 있었다는 사실과 인류의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두번째, 에스겔이 다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33장은 에스겔서의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어제 읽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유다 백성에게 닥친 멸망을 알리는 ‘파수꾼(예언자)’으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유다 백성이 ‘멸망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가도록 알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24장으로 거슬러 가야 합니다. 24장 15절 이하에는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이 기록됩니다. 그 충격으로 ‘에스겔’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실어증’에 걸린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침묵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봅니다.) 그래서 25~32장에 이르는 ‘심판 예언’은 말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만 남긴 것으로 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계획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입을 열어 ‘파수꾼(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33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그 이상입니다. 22절의 기록을 가만히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인들의 멸망조차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간절함, 악인들이 돌이켜 생명의 길을 걷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11절)에 감격했기 때문에 굳게 닫힌 입을 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에 녹은 것입니다.

‘사명 감당’이라고 말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사람의 정의감, 선택에 대한 우월감, 부르심에 대한 자기 최면’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녹은 사람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우월감, 정의감, 자아 도취’에 자극 당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 ‘주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감당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2. 우리는 자칫 23~29절을 읽으면서도 또 나쁜 버릇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와 저들을 나눠서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저들보다 끌려온 우리가 좀 더 나은 것 아닌가?”라는 착각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저울질합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저기보다는 여기가… 그것보다는 이것이…”라며 이리 저리 잽니다. ‘절대적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상대적 인간의 기준’을 계속 들먹입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조금만 괜찮은 것 같으면, 조금이라도 내가 나은 뭔가 있으면, 자기 의로움이 고개를 듭니다.

3. 30~33절의 기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십시오. “가서 여호와께로 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30절)라며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에스겔에게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듣는 시늉만 합니다. 자기들 마음에 드는 말만 들으려 합니다. 입으로는 갖은 좋은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기 이익’ 즉, ‘자아숭배’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네, 3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그대로 보고 계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 저는 그런 자입니다. 이런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전적인 십자가 은혜’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주님, 이런 사람이 될까 너무 두렵습니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32절에서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익숙함, 반복됨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서 자기 편의로 받아들이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혹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고운 음성, 사랑의 노래”로만 들리십니까?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하여 “음악을 잘하는 자”를 판단하듯 평가, 판단, 비평이 되십니까? 그럴 때, 잠시라도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귀에 들리고, 머리를 스치는 ‘전달자’의 표현 테크닉, 전달 기술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본심 앞에 여러분의 영혼을 내어드리십시오. “마음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따르던 내가, 전심으로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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