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8장 12~27절
1.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과 당부에 대한 기록이 마무리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체포와 재판 장면(18장)으로 넘어갑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하시고, 체포되신 장소인 ‘겟세마네(Gethsemane)’라는 표현 대신 ‘그 곳에 있는 동산’으로 기록합니다.
이런 것까지,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묵상해보면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하셨던 기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26:39;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22:42)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대단한 사명(?)을 위해 하셨던 기도, 오직 신적 능력을 지닌 존재의 기도가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빠지지 않아야 할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생각 반대로 살 수 있는 능력(오직 십자가 은혜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능력)’을 이미 주셨음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더 없습니다.
내 생각 반대로 되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기쁜 이유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 ‘나에게 소망 없고, 예수님에게 소망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기도의 현장은 ‘그 곳에 있는 동산,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그곳’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나를 버리기 위해, 내 욕망을 굴복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고, 내 생각 반대로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때 오는 진정한 기쁨, 참 즐거움을 경험하십시오. 사라질 땅의 것에서 돌이켜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2.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끝났을 때였을까요? 그 기도가 여전히 진행 중일 때였을까요? 드디어 들이닥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군대와 천부장”(12절)이라는 것을 볼 때, 로마 군인들도 함께 왔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범으로 고발을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환호하는 군중들의 기세를 봤을 때, 자신들의 병력(성전 경비대)으로 예수를 체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체포하여 가장 먼저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Annas)’에게 끌고 갑니다. 13절은 조금의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안나스’는 AD 6년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빌라도(Pilatus)’ 총독의 전임자였던 ‘그라투스(Gratus)’ 총독에 의해 AD 15년에 해임됩니다. 그 이후 ‘안나스’의 다섯 아들과 사위 ‘가야바(Caiaphas)’가 돌아가면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13절의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는 짧은 기록을 통해 유대교의 타락상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요한’이 ‘가야바’에 대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14절)라고 강조하면서 ‘11장 50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3.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홀로 대속의 제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는 ‘가야바’의 속마음과 상관없이 그의 입으로 뱉은 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한 의도(예수님을 죽임으로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한 뜻(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 의로움과 자기 이익을 위해 결정한 것, 아무것도 모르고 본성대로 행한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일을 행하십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의 선함과 반대로 걸어갑니다. ‘가야바’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에봇을 입었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당장의 권세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걸어가는 방향은 십자가 반대 방향입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목회자라는 것이 저를 감추는 또 다른 껍데기가 될까 가장 무섭습니다. 이렇게 글로 쓰는 묵상, 쏟아내는 설교, 외치는 기도 마저 저를 가리는 수단이 될까 겁이 납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더 교묘한 나태함이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것이라 믿고, 행할 것입니다. 대신 뻣뻣하게 서있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줄 믿고, 납작 엎드리는 것이 사는 길인 줄 믿겠습니다.
4. 오늘 본문을 보면서 ‘베드로의 배신’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저도 순간 순간의 삶 속에서 제 자신의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불을 쬐는 따스함에 취해 그 불빛 앞에 드러난 내 얼굴(내 본성, 내 속사람, 숨은 탐욕 등)이 드러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제 자신을 봅니다.
저와 여러분은 ‘빛이신 하나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빛 비추심’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런 비추심이 나에게 일어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우리에겐 ‘은밀한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0절)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들은 자들”(21절)을 통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을 들은 자’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빛 앞에 드러난 자’입니다. 드러난 줄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땅의 허탄한 것, 시들어 버릴 것으로 자신을 가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가리움 받으려 합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예수 닮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에 합당한 열매가 우리 삶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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