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위기 6장 8~23절
1. 오늘 본문은 레위기 전반부에 기록된 ‘번제(8~13절)’와 ‘소제(14~23절)’에 대한 추가 규정입니다.
‘민수기 28장 3절’을 보면, 의무 제사인 ‘번제’는 제사장이 아침 저녁으로 드렸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9절을 보십시오.
저녁에 드린 ‘번제’가 아침까지 타오르도록 땔감을 충분히 준비하여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완전히 타버린 제물의 재 등을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남아 있는 불에 다시 장작을 올린 후 아침 ‘번제’를 드렸습니다(9, 12절).
그 불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침부터 각종 제사(죄인들이 대속의 은혜를 입기 위한 제사)에 드려진 제물(나 대신 죽은 짐승)을 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런 나를 위해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밤새 꺼지지 않는 ‘제단의 불’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런 연약하고, 간사하고, 답답한 나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십니다.”(로마서 8장 26절)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자다가 문득 일어나 이런 나 자신 답답하여 어쩔 줄 몰라 결국 무릎 꿇고 기도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억울하고, 분해서가 아니라… 밤 중의 고요함, 적막함에 드러난 내 모습 때문에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단순한 인간 감성의 예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알고 계십니다.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지 않는 나 때문에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기도합니다. 저를 향한 성령님의 탄식이 한숨이 아니기에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다시 엎드려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기도합니다.
3. ‘꺼지지 않는 제단의 불’, 그 두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죄 사함의 증거, 죄 멸함의 증거는 ‘불로 태움’입니다. 그냥 불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한 불, 주어진 불’입니다.
네, ‘성령의 불’이 아니면 우리의 죄는 태워지지 않습니다. 자아 속에 숨겨진 죄라는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인간 내면(본성, 죄악)은 태울 수 없습니다. 용서받고, 해결될 가능성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모릅니다. 자아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만만하게 봅니다. 아니,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비춰 주심 가운데 민감함을 유지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는 사람입니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본성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기 머물지 않고, 얼른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영적 민감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도 또 십자가에 못 박힌 못을 뺐습니다. 자아가 못 박힌 고통이 사는 길,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또 잊었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찔림과 그 감각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4. 사실, 영적인 찔림은 ‘아, 몰라!’하며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습니다. 당장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것들로 영혼의 찔림을 덮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셈법에서 ‘수십년’을 덮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지막에 다 드러납니다. 그 분의 영원함 속에서 덮어둔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언제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마지막’을 생각하며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내 자아가 도덕적으로 개선되는 것, 사람이 말하는 거룩(?)해짐이 아닙니다. 양파껍질 보다 더 교묘한 내 자아가 한 꺼풀 씩 죽어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히 남는 것이 ‘영화(榮化, Glorification)’입니다. 내가 아닌 예수만 남는 것이 진정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5. 이 마음으로 1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불 태워는 것을 통해 용서되는 영적 의미 속에 두가지 의미가 공존합니다. 하나는 ‘완전 소멸’입니다. 또 하나는 ‘아직까지 여전히 있으나 가리워짐’입니다. 신학적 표현으로 하자면,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구원 이후의 삶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공존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엎드리고 또 엎드리지만, 그 엎드림 마저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런 나에 대한 절망 앞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부여잡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잡한(?) 레위기가 아니라, 그 말씀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이 생각나고,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다시 살수 있는 힘을 얻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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