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2021년 수요일 묵상
- Hyung Yun
- 2021년 3월 17일
- 3분 분량
본문: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여정에서 ‘여리고’에서 있었던 ‘구걸하던 맹인’과 ‘삭개오’는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인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자(10절)’를 ‘십자가로 부르시는 영적 초청’과 그 초청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냥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구걸’이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낮은 마음, 절박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의 큰 주제는 ‘잃어버린 자’를 십자가로 부르시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로의 초청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의로움과 종교성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은 오늘날 잘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대속의 은혜’로의 초청은 ‘잃어버린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구걸하던 맹인(18장 35~43절)’, ‘세리 삭개오(1~10절)’ 무엇보다 자기는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과 ‘성경을 읽는 모든 자들’이 ‘잃어버린 자(10절)’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이런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 중 과연 몇 명이나, ‘제가 잃어버린 자입니다. 제가 구걸하는 맹인, 세리장 삭개오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읽을까? 나는 정말 구걸보다 더한 구걸을 하는 심정으로 십자가에서 베푸신 긍휼을 구하고 있는가?”라는 영혼의 질문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3. 우리는 참 엉뚱하게 성경을 읽습니다. ‘삭개오’하면 ‘뽕나무’, ‘키 작은’이라는 선입견 가득한 생각으로 읽듯이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지식과 경험, 이해로 성경을 대합니다.
마치, 성지 여행 중 여리고를 방문하면 너나할 것 없이 “어느 나무가 삭개오 뽕나무인가요?”를 질문하는 여행객들 같습니다. 현재 수령 700년 정도 된 삭개오 뽕나무(돌감람나무)라 믿고 싶은 그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객처럼 성경을 읽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지금까지 우리는 삭개오가 돌감람나무에 올라간 것을 강조했을까? 인간 삭개오가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갔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강조하고 싶어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혹자들의 해석처럼 “‘돌무화과나무’는 가난한 자들의 나무였다. 값비싼 ‘무화과’를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무화과 대신 비슷한 ‘돌무화과’라도 먹기 위해 올랐던 나무다. 부자였던 ‘삭개오’가 그 나무를 오른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한 행동이었다.”라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삭개오의 행동이 이 본문의 주제라면 결국 ‘행위구원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행위구원의 함정’이라는 인간 사람 행위의 어떠함으로 괜한 의로움 혹은 우쭐거림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변화된 삶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4. 따라서 삭개오의 이야기는 전적부패 타락하여 그 어떤 의를 행할 능력이 없는 범죄한 인간을 ‘십자가로 부르시는 거룩한 초청’이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특히 3절의 “키가 작고”를 다시 봐야 합니다. ‘키’ 즉, 사람의 신장(height)로 번역된 헬라어 ‘helikia’는 ‘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helikia’의 참 뜻이 아닙니다. 지엽적 의미에 불과 합니다. ‘helikia’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어떤 일에 대하여 자격 요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작고’로 번역된 ‘mikros’는 ‘사물의 크기의 작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그의 키가 작은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삭개오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범죄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신분 그러니까, 세리 혹은 부자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는 비천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 주심’을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5.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가 높은 데 올라갔지 않느냐, 그래서 예수님 눈에 띈 것이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삭개오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우리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말입니다.) 결국, 범죄한 인간의 의로움은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갖췄더라도 그저 ‘잃어버린 자’일 뿐입니다. 그렇게 헤매다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생명의 십자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 부르심의 음성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근본 죄인인 나를 십자가로 불러 주시는 그 은혜를 경험했다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는 분명 달라집니다. 마음의 자세는 낮아집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귀한 생명의 열매로 드러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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